QT

요한복음5:19-29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재판에「제척」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판사가 피고 또는 피해자의 친족인 경우에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법관을 재판에서 배제하는 제도입니다. 친족은 특별합니다. 형법에서 범죄자 은닉은 최대 징역 3년까지 처벌받게 되어 있지만 친족인 경우에는 이것을 특례로 하여 처벌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죄를 지어 집으로 숨어들어 왔을 때 부모가 신고하지 않아도 그것을 범죄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법은 공정해야 하고 평등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모가 법관이라고 하여도 공정하게 재판하여야 할 것이고 범죄하고 숨어있는 자식을 이끌어 법 앞에 세워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법은 그래야 할 것 같지만 법조차도 친족은 그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합니다만 법도 그 피의 농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예수님의 아버지는 왜 심판을 직접 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을까요? 어떤 사람의 아들이 죽을 죄를 지었는데 그 아버지에게 직접 아들을 재판하고 사형 선고를 내리라고 한다면 그 아버지는 법의 논리를 택해야 하겠습니까? 아들을 살릴 길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정치철학적 발언이 아닌 각자 개인의 상황이라면 그 고백은 어떠십니까?


체코 영화 중에 「MOST」라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아빠는 기차와 배가 지나가는 개폐식 다리의 기계실에서 일하는 기사였습니다. 배가 지나가면 다리를 열어주고 기차가 지나가면 다리를 내려주는 일을 합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은 아빠를 졸라서 아빠의 직장에 따라 갔습니다. 아이는 강가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배가 지나간다는 연락이 들어오자 아빠는 다리를 올려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배가 다리 밑을 통과하고 있을 때 천천히 오고 있어야 할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은 달려오는 기차를 발견하고 아빠에게 소리쳐 외쳤지만 기계실 소음 때문에 아빠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을 인지한 어린 아들은 스스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다리 위로 올라가다가 다리 밑 기계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


그제서야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듣고 상황을 인식한 아빠가 다리를 내리려는 순간 시야에서 아들이 사라진 겁니다. 아빠는 다리 아래 기계에 빨려들어가 있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레버를 내리면 아들은 기계에 끼여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려면 레버를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레버를 내리지 않으면 기차가 탈선하여 전복될 것이고 다리 밑을 통과하고 있는 배와 충돌할 것입니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른바「트롤리 딜레마」입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정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선택을 해야만 하는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결국 다리의 레버를 내립니다. 아들을 희생하고 기차를 살리는 선택을 했습니다. 기차가 지나가고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이 영화의 인상적 이미지는 아마도 기차가 급박하게 달려오던 순간이나 아버지가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장면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포스터는 마약에 취한 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여자가 약에 취한 채 초점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광경이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었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이 죽어갈 때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술과 마약으로 웃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희생된 어린 아들이 아니고 기차와 배가 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까? 그렇다면 아버지는 차마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이십니까? 그렇다면 결코 죄를 숨기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제척하셨고 일체의 전권을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이 희생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자녀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전부입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