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6:41-51
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6: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6: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6: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딸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부모는 슬픔 속에서 딸을 보내며 엄숙한 결정으로 딸의 장기를 기증했습니다. 딸의 장기는 여섯 명의 미국인에게 나누어 기증되었고 그 수혜자가 한국을 찾아 가족을 위로하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사고를 당한 것은 4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의 일처럼 울먹이는 부모의 눈물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어머니는 낯선 미국인의 몸 안에 딸의 장기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딸을 안은 것처럼 감격스러워 했고 이식받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애써 눈물을 훔쳤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유람선이 침몰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객실 입구 부분에서 한 여성이 어린 소녀를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너무나 꼭 안고 있어서 발견 후에도 팔을 풀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국인 관광객이었고 할머니와 손녀였습니다.

 

할머니는 죽음이 엄습해 올 때 벨트보다 강한 팔로 손녀를 끌어안았습니다. 구조대원은 인터뷰에서 물이 역류하면서 주변에 있던 책상과 냉장고 등이 할머니의 몸과 부딪혔을 텐데 손녀를 안고 있던 팔을 놓지 않으셨다는 것이 놀랍고 가슴 아팠다고 전했습니다.

 

육신은 약해서 다치고 상하고 죽습니다. 인생은 정해진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합니다. 죽음은 화살 같아서 언제 날아와 꽂힐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남겨진 자의 슬픔은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 슬픔 속에서도 한 줄기 소망을 주는 것은 체온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기꺼이 장기를 내어준 생명의 나눔 때문이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손녀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치던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논어에「살신성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공자가 말한 살신성인은 인의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어서 이 땅을 사는 동안 소망이 되고 감동이 됩니다.

 

자신의 생명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것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그것을 잃은 슬픔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은 얼마나 울어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사랑과 살신성인의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살신성인에 구원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연약한 육신의 공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인」(仁)일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불쌍한 것들밖에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살 권리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세상에 남아있는 아름다움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스스로를 떡이라고 하시고 그 떡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희생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네가 영원토록 살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의를 이루는 인간적 공감과 위로가 아니고 영생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살신성인의 공감과 사랑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약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 의지할 위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스스로 살신하여 구원하시고 영생의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