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2月1日 主日礼拝
「共同体の一致のために」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ヨシュア 4:10-14
여호수아 4:10-14
趙鏞吉 牧師
조용길 목사

 

지난 번 설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동편에서 요단강을 건너 서편으로 건너갔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 사만명이 무장하고 먼저 강을 건너 여리고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터 가나안 정복전쟁이 시작될 텐데 정복 후에는 열 두 지파에게 땅이 분배될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에 땅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지도를 보면서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이 지역을 다 점령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도에는 요단강 동편에도 몇 개의 지파가 땅을 차지하고 정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를 다 정복했고 동과 서의 땅을 분배하고 정착한 것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땅은 서쪽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요단강 동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쪽 땅을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의 일부가 차지한 것은 정복전쟁이 끝난 후에 그렇게 분배한 것이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미 그렇게 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동쪽을 이미 할당받기로 확정이 되어 있었다면 서쪽으로 굳이 건너가서 싸울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 설교 본문에서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가 버티고 섰을 때 한 명도 빠짐없이 동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다 건너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건너온 것을 확인한 후에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왔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기업을 얻었던 지파들도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것도 제일 먼저 무장하고 앞장서서 건너갔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서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비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비화도 성경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민수기에 나오는 한 사건이 배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읽어보겠습니다.

32:1 ルベン族とガド族は、非常に多くの家畜を持っていた。彼らがヤゼルの地とギルアデの地を見ると、その場所はほんとうに家畜に適した場所であったので、
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32:2 ガド族とルベン族は、モーセと祭司エルアザルおよび会衆の上に立つ者たちのところに来て、次のように言った。
32: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족장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32:3 「アタロテ、ディボン、ヤゼル、ニムラ、ヘシュボン、エルアレ、セバム、ネボ、ベオン。
32: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32:4 これら主がイスラエルの会衆のために打ち滅ぼされた地は、家畜に適した地です。そして、あなたのしもべどもは家畜を持っているのです。」
32: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32:5 また彼らは言った。「もし、私たちの願いがかないますなら、どうかこの地をあなたのしもべどもに所有地として与えてください。私たちにヨルダンを渡らせないでください。」
32:5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그곳은 가나안에 진입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이미 싸워서 정복했던 아모리 족속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이었습니다.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 험한 요단강 건너지 않아도 충분한 좋은 땅이었습니다. 굳이 가나안에서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땅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르우벤과 갓 지파 자손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전체가 정착할 만한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만 이 땅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민수기는 아직 모세가 그들의 지도자였을 때였습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의 말을 듣고 모세는 진노했습니다.
32:6 モーセはガド族とルベン族に答えた。「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は戦いに行くのに、あなたがたは、ここにとどまろうとするのか。
32: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32:7 どうしてあなたがたは、イスラエル人の意気をくじいて、主が彼らに与えた地へ渡らせないようにするのか。
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32:14 そして今、あなたがた罪人の子らは、あなたがたの父たちに代わって立ち上がり、イスラエルに対する主の燃える怒りをさらに増し加えようとしている。
32: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32:15 あなたがたが、もしそむいて主に従わなければ、主はまたこの民をこの荒野に見捨てられる。そしてあなたがたはこの民すべてに滅びをもたらすことになる。」
32: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무섭습니다. 그러나 저주가 아닙니다. 협박도 아닙니다. 너희만 안전하려고 한다면 너희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 불신앙으로 죽으면 우리가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운명을 함께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지파가 동쪽 땅을 달라고 하면서 또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안가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에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하나 더 하겠습니다. 두려움은 죄입니까?

 

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민수기 14장에 정탐을 나간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읽어봅시다.
14:36 モーセがかの地を探らせるために遣わした者で、帰って来て、その地について悪く言いふらし、全会衆をモーセにつぶやかせた者たちも。」
14: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14:37 こうして、その地をひどく悪く言いふらした者たちは、主の前に、疫病で死んだ。
14: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14:38 しかし、かの地を探りに行った者のうち、ヌンの子ヨシュアと、エフネの子カレブは生き残った。
14:38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두려움을 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앞에 두고 두려움으로 그것을 그르치는 일은 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저주가 아닙니다. 모세의 분노는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입니다.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도 또 두려워서 도망가다가 죽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그 부정적인 말과 두려움으로 믿음을 방해했던 일로 공동체가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고 위기로 몰렸는지 기억하지 못하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 정복이라는 엄중한 사명을 눈 앞에 둔 이스라엘 앞에 이미 넓은 목초지에 정착해버린 지파들의 안정은 부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도전하고 희생하는데 한쪽에서는 이기적 안정을 취하면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목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두 지파가 기어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편안한 삶만 택했다면 다른 지파들에게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위험부담은 지려고 않고 안정은 취하려고 한 것입니다. 얄밉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하는 것은 그들의 광야생활이 이미 위험이었습니다. 아니 4백년이 넘은 시간 동안의 노예생활이야 말로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가 안정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400년을 기다려 건져 주시고 40년을 구름기둥 불기둥을 지켜 주신 하나님이 이제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데 그 앞에서 위험부담 때문에 들어가기 싫다고 주저앉아버리는 것입니다. 위험부담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물론 도전보다는 안정을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정이나 유지가 아니고 서서히 퇴화해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 교회가 당면한 절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지’입니다. 교회 유지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줄고 재정이 줄고 목회자가 부족해서 교회가 사라지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7800교회 중에 13%이상이 목사가 없는 무목교회입니다. 현역목사의 절반이상이 60대, 70대이상입니다. 이것도 2014년 데이터입니다. 10년 이내에 13%에 해당하는 현재 천여개의 무목교회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지금 절반이상의 교회들이 무목화되어 갈 것입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성도는 고령화되는데 주일학교는 없어집니다. 재정이 줄어들면서 사역도 줄어들고 기어이 어느 시점에서 교회가 역사에서 멈추어 버립니다.우리가 사는 시대에 문제는 심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의 시대에 교회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답을 말하기 전에 질문을 바꾸어 봅시다. 교회는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가 교제하는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의 소식을 전파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교회는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지하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존재하고 있을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을 모은 다음에 돈이 생기면 예배하면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 돈이 있으면 선교하고 그리고도 남으면 구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교회에 위임하신 일들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면 재정과 사람이 모이고 교회는 살아서 역동적으로 운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예배하지 못하고 돈이 없어서 선교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돈이 많아서 우리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도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유지가 안되니 예배를 받아 버립니다. 선교를 포기해버립니다. 몸집을 줄이고 생존전략으로 들어갑니다. 이것도 컷트하고 저것도 컷트하고 식물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생존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흐르는 물에 언약궤를 메고 들어가지 않으면 광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멸해야 합니다.

 

헌신하는 것도 돈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돈이 없어서 헌신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신학교에 갈 자신이 없는 것 뿐입니다. 저는 가족에게는 입이 열 개여도 할말이 없지만 가족에게 항상 했던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신학 공부하려면 자기가 준비해야 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 아내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신학교 기간을 버티려고 아기를 안고 일본으로 들어왔지만 교회일만해도 바빠서 아르바이트는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나누어 주면 주었지 없어서 굶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해서도 아니고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것이 다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신의 삶은 그것을 믿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믿지 못하는데 무엇을 위해서 어떤 이유로 헌신한다는 말입니까? 여기가 동네 집회소가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라면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교회의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입니다.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교회는 유지가 아니라 오히려 성장하고 확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자녀교육도 유지를 목표로 하면 결국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면 잠시 안정을 누릴지 모르지만 그 다음 세대는 또다시 더 많은 결핍과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호강하려고 그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백성들은 배만 고프면 돌을 들어 모세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자녀들의 등을 밀어주고 본인은 사라졌습니다. 산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고 혼자 죽었습니다. 노예의 시간과 광야의 방황의 시간을 살았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약속의 땅 구원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왜 제사장이 그 오랜 시간 젖은 발로 요단강에서 언약궤를 진 채 버텨야 했습니까?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 불평하는 사람들, 아직도 노예생활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 그들이 소유한 소중한 재산인 가축들까지 다 안전하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사건은 믿음 좋은 모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가르치고 그 업적을 세워 주기 위한 것입니까? 제사장들의 믿음의 상을 주기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없이 저 먼발치에서 따라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저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사용하시고 여호수아를 사용하시고 제사장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얄미운 르우벤과 갓까지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앞에 서서 희생한 사람들을 믿음의 우월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눈치가 빨라야 하고 뜻을 알았으면 충성스러워야 하고 일을 하면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먼저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불가운데 뛰어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희생과 용기와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그들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어드벤트에 들어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4주간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라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오셨지만 더욱 낮은 종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이 주제가 아니고 그 희생으로 구원받는 백성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저 뒤에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오는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이 엄격하게 가르치신 누가복음의 오리엔테이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7:9 しもべが言いつけられたことをしたからといって、そのしもべに感謝するでしょうか。
17: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7:10 あなたがたもそのとおりです。自分に言いつけられたことをみな、してしまったら、『私たちは役に立たないしもべです。なすべきことをしただけです。』と言いなさい。」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종 모세는 어떻게 하든 타일러서 공동체가 다시 일치를 이루게 해야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대답합니다.
32:16 彼らはモーセに近づいて言った。「私たちはここに家畜のために羊の囲い場を作り、子どもたちのために町々を建てます。
32:16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가로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32:17 しかし、私たちは、イスラエル人をその場所に導き入れるまで、武装して彼らの先頭に立って急ぎます。私たちの子どもたちは、この地の住民の前で城壁のある町々に住みます。
32:17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32:18 私たちは、イスラエル人がおのおのその相続地を受け継ぐまで、私たちの家に帰りません。
32:18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32:19 私たちは、ヨルダンを越えた向こうでは、彼らとともに相続地を持ちはしません。私たちの相続地は、ヨルダンのこちらの側、東のほうになっているからです。」
32:19 우리는 요단 이편 곧 동편에서 산업을 얻었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아니하겠나이다

 

“여기를 주시기만 하면 가축과 아이들을 안전하게 해놓고 우리는 무장하여 선봉에 서서 싸우겠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각각의 기업을 다 얻을 때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이미 동편 땅을 얻었으니 서편 땅을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맹세합니다. 잠시의 욕심과 이기심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가장 선봉에 나서는 지파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지파가 된 것입니다.

 

4:12 ルベン人と、ガド人と、マナセの半部族は、モーセが彼らに告げたように、イスラエルの人々の先頭を隊を組んで進んだ。
4:12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4:13 いくさのために武装した約四万人が、エリコの草原で戦うために主の前を進んで行った。
4:13 사만명 가량이라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그들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넜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게 할 때 열 두 지파가 동일한 경험을 했고 그것을 기념했습니다. 각 지파에서 선발된 열 두 명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진 장소에서 돌을 하나씩 취하여 기념물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열 두개입니다. 어느 한두 지파의 헌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열 두 지파라는 공동체가 함께 경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열 두 지파가 힘을 합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열 둘이라는 숫자와 각 지파에서 한 사람 씩이라는 말과 지파 수대로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열 두 지파에 의해 옮겨온 열 두 개의 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지파는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하나의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열 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우게 하신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한 지파의 예외도 없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되어 있지만 그들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세대를 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 의식의 확인이고 지역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허락하지 않고 구원받은 백성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로 혈연 이기주의와 지역 이기주의와 가족 이기주의까지 극복해 냅니다.

 

공동체는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앞에서 일치를 이루고 나가면 반드시 이깁니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약속을 잊지 않고 선봉에 섰던 것이 가나안 정복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승리의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어드벤트의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 우리의 기다림과 함께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드리는 12월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