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の説教 아침 설교:【지식과 말】20191118
▶箴言12:23 利口な者は知識を隠し、愚かな者は自分の愚かさを言いふらす。
▶잠언12:23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23節は、知識の量や考えの愚かさ、そのものを言うのではなく、それを表す程度に関する教訓でしょう。もっている知識のすべてを表してしまうと、結局それしか分からないということを雄弁し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自分を表したい人は、底から引っ張り出して言い切ってしまいます。 SNSなんかをみると、自分を表すことに夢中になっている人々を見つけます。より刺激的なイメージで注目されるために危険な写真をも撮ったりします。それで死亡事故も少なからずあるそうです。それほど身振りをしないならば評価を受けなくてもいいなのに、自分のすべてを表すことによって、空っぽの評価を受けてしまいます。
▶23절의 말씀은 지식의 양이나 생각의 미련함 그것 자체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다 쏟아부으면 자신은 결국 그것 밖에 모른다는 것을 웅변해 버리는 꼴이 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이른바 본전을 다 사용해버립니다. SNS를 열어보면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을 봅니다. 더 자극적인 이미지로 주목받기 위해서 위험한 사진을 찍다가 죽기도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평가를 받지 않을텐데 자신의 본전을 다 드러냄으로 그 가벼움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だから、賢い人は口で自分が持っているもすべてを露出することはしません。出しゃばることはしません。ましてや知っていることがないのにたくさん言ってしまえば、無知の発覚のうえ、軽さと愚かさをかぶってしまうことでしょう。知ったふりをすると意味のない言葉を繰り返し、へなへなして他人のことを盗用し、根拠のない誇張をするわけです。最初はやりくりが、一貫性がなくなって、最終的には、言葉の信頼を失うことになります。自らの無知を雄弁するので、それを愚かだと言うしかありません。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말로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나서지 않고 나대지 않고 지식에 있어서 오지랖을 넓히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식이 없는데 말을 많이 해버리면 원래의 무식 위에 어리석음을 뒤집어 써버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는 척하려고 하다보니 의미없는 말을 반복하게되고 줏대없이 남의 것을 도용하고 근거없는 과장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변통을 하지만 일관성이 없어져서 결국에는 말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말을 많이 함으로 스스로의 무식함을 웅변하니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知識からおしゃべりを引いたとき、残りがなくてはなりません。講義や発表より討論や論争がより重要なのは、知識の残りの状態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例えば、論文の発表はよくしても、質問にうまく答えなければその知識は言葉の表面に止まってしまいます。一方、発表は注目されなかったとしても、質疑応答の過程で、深みを感じることもあります。いつか聞いた音楽オーディション番組ですが、出演者が歌をよく歌いました。難しい歌の高音をよく上げたのです。ところが、審査者が評価することは、「高音を出しましたが、それだけではいけません。上がり残りがなくてはいけません。」ということでした。
▶지식에서 말을 빼고 나면 남음이 있어야 합니다. 강의나 발표보다 토론이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의 남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논문 발표는 잘했지만 질문처리를 못하면 지식은 말의 표면에 멈추고 맙니다. 반면에 발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질의응답 과정에서 그 연구의 깊이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어려운 노래의 고음을 잘 올리더군요. 그런데 심사자가 평하기를 “올라가긴 올라갔지만 그것으로 안됩니다. 올라가고 남음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余裕がなければならない。水墨画のように言葉にも空間と余白を残すということです。ペテロⅡは、知識に節制を節制に忍耐を加えることを進めています。だからといって沈黙がすべての場合に美徳になることでもありません。箴言25章11に「時宜にかなって語られることばは、銀の彫り物にはめられた金のりんごのようだ。」とあります。知識の言葉を時にかなって適切に程よくすることが、信仰の教養でしょう。
▶여유를 가져야합니다. 수묵화처럼 공간과 여백을 남겨야 합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침묵이 모든 경우에 미덕은 아닙니다. 잠언 25장11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수목화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금사과를 돋보이게 하는 은쟁반이 됩니다. 지식의 말을 경우에 맞게 적절히 고루게 하는 것이 믿음의 교양이라고 할 것입니다.
▶コロサイで今日の教えのヒントを得ました。 「4:6 あなたがたのことばが、いつも親切で、塩味のきいたものであるようにしなさい。そうすれば、ひとりひとりに対する答え方がわかります。」パウロの表現が心に触れます。塩味をつけるように口を用いる人が知識を用いる人です。
▶골로새서에서 오늘 말씀의 힌트를 찾았습니다.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치듯이 하라는 ㅏ도 바울의 표현이 와닿습니다. 소금에 절이지 말고 고루 소금을 치듯 말하는 사람이라면 말과 지식을 잘 사용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