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바울이 탄 배가 파선하여 멜리데(몰타) 섬에서 3개월을 지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울 덕분에 배에 탄 사람들은 전원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자 호송을 담당하고 있던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대단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3개월을 체재했던 그곳 멜리데(몰타)섬 주민들도 바울을 존경하여 바울을 좋은 대접을 하였던 것을 지난 주에 읽었습니다.
바울이 체재하고 있던 멜리데(몰타)섬에는 기분 좋은 가을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3개월 동안 멜리데(몰타)에서 특별한 자유와 안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온 우리는 이 공간에서의 시간을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돈이 없어도 부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유를 주어도 자유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박당하고 있는 것 같아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묶인 것 같지만 진정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가난한 것 같지만 복을 나누어 주는 진정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개 죄수이면서 위기에 빠진 배를 지휘했고 300명 가까운 생명을 먹이고 살리고 기어이 전원을 구조해 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드러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6:9 人に知られないようでも、よく知られ、死にそうでも、見よ、生きており、罰せられているようであっても、殺されず、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6:10 悲しんでいるようでも、いつも喜んでおり、貧しいようでも、多くの人を富ませ、何も持たないようでも、すべてのものを持っています。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나님이 통로로 사용하시는 사람은 그런 것 같습니다. 소유는 없는 것 같으나 고갈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고, 가진 소유를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면 소유가 없거나 사람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대신 그 소유를 의지하기 시작하고 사람의 힘을 빌려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위해 도전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의 삶을 살지만 시대와 역사를 바꾸어 가는 삶을 삽니다.
시편 34편 19에서
19 正しい者の悩みは多い。しかし、主はそのすべてから彼を救い出される。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했습니다.
고난받는 의인, 원래 세상과 인간이 의롭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는 의인이 있다면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들어가는 바울이지만 바울의 생애는 온 세계와 역사에 의로운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본인이 말한대로 근심이 많은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悲しんでいるようでも、いつも喜んでおり)입니다. 진정 헌신된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何も持たないようでも、すべてのものを持っている)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그런 천국을 닮은 평안이 우리 믿음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평안은 그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신앙이 영혼의 평안을 낳는 것뿐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않은 채 추구하는 평안은 평안이 아니라 잠시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그 평안은 사라질테니까요.
이윽고 바울은 멜리데(몰타)섬에서 3개월을 지낸 후 일어나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다시 항해를 하게 됩니다. 지난번 배는 망가졌기 때문에 다른 배를 탔지만 이 배도 알렉산드리아의 배였습니다. 누가는 이 배의 뱃머리에 ‘디오스구로’라는 나무로 조각한 장식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누가에게는 그것이 아주 인상적인 것이었나 봅니다.
‘디오스구로’라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달의 여신 레다의 쌍둥이 형제인 카스트와 폴럭스를 조각한 장식을 말합니다. 뱃사람들은 이 쌍둥이 신이 바다의 위험과 조난의 위기에서 구해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누가 그리고 276명의 조난자는 이미 바다에서 죽을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경험을 했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배의 장식을 바라보면서 디오스구로가 진정 풍랑을 막아주고 배를 보호해 주고 조난자를 구해주었는가라는 회의적 의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선으로 누가는 디오스구로의 장식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근거도 없는 허무한 것에 의지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그 배에 탄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구원하셨습니다. 죄인도 군인도 상인도 차별없이 구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 보았고 또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한 시간동안 바울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적어도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일상의 안전과 영혼의 평안을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수호신은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의 공적 신앙고백 말고 주일 오후부터 토요일 밤까지 일주일 동안에는 무엇을 의지하십니까?
의지하고 있는 그것이 곧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까? 그것이 실제로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우상임이 분명한데 이름표에는 하나님이라고 적고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의지할 만한 것이 있을 때 습관처럼 말하십시오.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지를 자신의 말로 고백하십시오.
배를 탈 때 276명중에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이미 그러한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절망의 위기를 만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바울의 말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진정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제 로마에 들어가면 전도하겠지요. 그러나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로마에 함께 들어갈 276명의 사람들이 이미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바울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짧은 시간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계획 안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과 함께 로마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 율리오가 처음에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었지만 나중에는 바울을 믿게 되었지 않습니까? 당연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의 생각이 바뀌어 갔던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도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사(人事)는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누구를 일으켜 세우실 지 모릅니다.
바울과 함께 운명공동체가 된 사람들은 잠시의 모험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알았고 그것을 들고 바울과 함께 로마로 들어가는 300용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동역자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복음을 가진 전도자가 가는 곳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멜리데(몰타)섬을 출발해서 배는 수라구사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사흘간 정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이탈리아 최남단의 레기온에 도착하여 하루를 더 기다렸는데 이것은 남풍이 불기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남풍이 불어줘야 배가 북쪽으로 올라갈 것이고 그래야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이의 메시나 해협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풍으로 부는 남풍을 타고 해협을 무사히 건너서 다음날 보디올(プテオリ)에 도착했습니다. 보디올은 지금 이름은 나폴리의 외항 포주올리(ポッツオリ;pozzuoli)입니다. 누가는 바울일행이 거기서 형제들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바울을 마중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제우스와 레다가 낳은 쌍둥이 형제 카스트와 폴럭스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동역자들인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의 가는 길에는 반드시 동역자들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바울과 동행하고 있는 누가도 동역자이며 형제이고, 276명의 승선자도 다 예비된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보디올(プテオリ)에서 만난 성도들도 처음 만난는 것이지만 복음의 동역자된 사랑하는 형제들입니다.
14절에 보면 이들의 간절히 요청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백부장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의견이 아니라 백부장이 허가를 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백부장이 그 부탁을 받아들여 일주일간 머물면서 형제들의 교제를 허락했습니다.
멜리데(몰타)에서 3개월을 쉴 때는 배가 없고 항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다시 출발한 배가 수라구사와 레기온에서 사흘을 쉬고 하루를 쉰 것은 바람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디올(プテオリ) 일주일을 쉬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배가 망가진 것도 아니고 항해가 금지된 것도 아니고 바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백부장이 바울을 마중나왔던 형제들의 부탁을 받고 일주일 동안 교제하며 체제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좀 의심스럽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의심입니다. 율리오는 이 시점에서 아마도 혼란을 겪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과 바울의 하나님의 부정할 수 없게 된 로마 장교 율리오는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이미 많이 전염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인물은 그저 배려심 때문에 허가를 해준 것이 아니라 바울이 동료들과의 대화와 교제하는 것을 보고 싶고 그들의 신앙의 비밀을 듣고 싶고 보고 싶고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입니까? 바울이 무늬만 목사이고 선교사이고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의의 사람들이 동역자가 되기 시작하고 사방에서 동역자들이 몰려옵니다. 핵심은 바울이 아니고 바울 안에 있는 복음입니다.
보디올(プテオリ) 에서 일주일간 교제한 형제들과 이별하고 배는 다시 떠나 이번에는 압비오 저자와 삼관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로마의 형제들은 압비오 저자와 삼관에 나와서 바울이 오는 것을 마중나와 있었습니다.
일본어는 헬라어 발음대로 압비오 광장을 アピイ・フォルム라고 번역했습니다. 광장이라는 의미의 ‘포루’는 포럼의 어원입니다. 포럼이 토론의 장이라는 말이지요. 압비오 저자의 압비오는 지명이고 저자는 거리나 광장을 말합니다.
또 일본어 번역에 トレス・タベルネ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의 ‘트리온 타베르논’ 을 발음한 것입니다. 의미는 ‘세 개의 숙소’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에 ‘삼관’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トレス・タベルネ 즉 삼관은 로마로 부터 50km정도 떨어져 있고, アピイ・フォルム 압비오 저자라는 광장은 로마에서 65km 떨어진 곳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로마로부터 65km 떨어진 곳과 50km 떨어진 곳까지 나와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것 같습니다. 비록 바울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3년 전에 받았던 편지 ‘로마서’ 를 통해 복음의 핵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던 형제들은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꼭 로마를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29 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満ちあふれる祝福をもって行くことと信じています。
15: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로 보내는 편지를 보낸지 만 3년만에 로마에 가게 되고 영적인 교제는 이제 만나서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을 공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면 어느 누구와도 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 만나지만 오랜 신뢰관계 안에서 만나듯 기쁨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바울이라는 철인 같은 믿음의 용사, 죽음을 각오하는 선교사에게 인간의 위로가 필요할까요? 15절을 보면 바울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8:15 ローマからは、私たちのことを聞いた兄弟たちが、アピイ・フォルムとトレス・タベルネまで、私たちを迎えに来てくれた。パウロは彼らに会って、神に感謝し、勇気づけられた。
28: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바울은 형제들의 위로로 인해 담대함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편지를 통해 이미 로마에 복음이 공유되었고 형제의 사랑이 시작된 것을 알았으니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욱 선교의 용기를 얻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많이 위로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그 힘겹고 어려운 로마로 가는 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3:7 このような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あらゆる苦しみと患難のうちにも、あなたがたのことでは、その信仰によって、慰めを受けました。
3: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로마에 도착한 후에는 빌립보 성도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에 감사하는 편지를 썼지요.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은 참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했고 그것은 선교의 동역을 이루었고 그리고 바울은 그 동역자들을 만나면서 다시 담대한 용기를 더 얻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복음으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동역자가 얼마나 있습니까? 영혼의 친구, 주 안에서 형제, 선교의 동역자는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복음이 견고할 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참 평안은 복음 안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참 위로는 순종하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순종한 사람의 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지만 일하지 않은 사람의 휴식은 나태일 뿐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성도의 서로 위로함이 선교의 담대함과 용기의 근원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