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24-29

베스도는 로마에서 파견나온 유대의 신임 총독입니다. 그래서 신임 총독의 부임 인사를 위해 유대왕 아그립파 왕이 총독부를 방문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이고 베스도 총독은 로마사람입니다. 그래서 배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을 만나자마자 지금 진행 중인 골치 아픈 사건, 이 바울의 재판 문제를 상담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에는 유대인들만이 알 수 있는 그들의 종교와 전통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독과 왕이 나란히 함께 앉아 있는 곳에서 바울이 다시 한번 불려 나와서 변론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지난 번 설교의 제목을 [나의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변론의 시간에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즉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했거든요.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교회의 하나님도 아니고 부모의 하나님도 아니고 목사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만난 절망적 존재로서의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감격, 그 증거가 예수님인 것을 말한 것입니다. 교리적인 설득이 아닌 체험적인 선언이지요. 물론 이런 것에는 논리성과 객관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진실하고 자신에게는 감격적인 사랑이라도 사람들이 들으면 유치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난 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름답고 감격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도 됩니다. 바울이 논리적이지 않아서 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는 사실 전할 수도 있는 것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전도해 보십시오 간절해지면 간절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간증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에 신앙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감격이 없으면 교리적 이해의 말만 되풀이하게 되고 자꾸 어려운 말을 인용하게 되고 사변적으로 흘러갑니다. 율법주의는 거기서 나옵니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어떤 생명력의 상태가 아니라 건조한 지식의 조각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도 신앙생활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상태로 발신되지는 않습니다. 즉 지적 이해만으로는 선교의 동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과 그것을 믿는 신앙이 물을 가득 머금은 스폰지 같은 것이면 좋겠습니다. 누르면 생명의 물이 나오는 상태 말입니다. 믿음, 헌신, 선교 등 이런 주제의 말은 강제하거나 권면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하나님이 없다면 시작되지 않습니다. 경험과 지식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습한 지식은 다시 자신의 것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분명히 교리를 정리했습니다. 그 교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말씀의 해석과 신앙의 경험의 간증이 체계를 이룬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배운 우리는 실제로 생활 속의 신앙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체험된 신앙은 다시 정리하여 체계화하는 간증의 축적을 또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반복하면서 발전하는데 그것을 멈추면 안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탁월하게 해낸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던 바울에게 총독 베스도가 말합니다.-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지금은 피의자 진술시간입니다. 지기 혐의에 대한 변호는 안하고 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했다는 그 신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베스도 듣기에 이상했을 것입니다. 소문난 학자라더니 저 바울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기어이 미친 것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건강에 이상을 일으키는 사람 실제로 봤습니다. 공부하다가 과로로 죽은 사람도 봤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치거나 죽거나 한 것이 아니고 공부라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물론 공부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지혜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시대는 오직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취업하기 위해서 공부하지요. 그것은 공부하는 목적의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지식의 양이 적어도 잘 통찰하고 그 지식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의 양은 많아도 미련하고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법을 다 외우고 있기 때문에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도서에 아주 반가운 말이 있습니다.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성경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해서 공부 많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 전도서에서 읽는 성경 지식이 단편적인 오해가 되지 않도록 문맥만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전도서 12장 12절에서 이어지는 13절을 꼭 기억하십시오.-12:12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 문장의 구조는 책 짓는 것 즉 지식과 공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과 대립되어 있습니다. 그 지식과 노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대체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신학서적 많이 출판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를 많이 했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공부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공부는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지식과 허무한 지식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통찰해서 자신에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근본이고 믿음의 기본입니다. 공부는 대학가고 취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인간과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쳤다고 하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미친 사람 취급받는 것은 낯선 일은 아닙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닙니다.-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미쳤다는 평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비난은 바울에게 일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늘 그런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미친 것이라면 미친 상태로 살겠다는 것이 바울의 신념입니다. 마니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헬라어 마니아(μανια)에서 온 말입니다. 원래 의미가 광기입니다. 미쳤다는 것이지요. 정신질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집중과 몰입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좋아서 미친 것이지요. 미치도록 좋은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미치도록 좋아해보지 않은 삶은 사실 불쌍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미친 사람도 있고 돈에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과 명예에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의 돈과 권력에 미친 사람 그들은 우리는 무엇이라고 평가합니까? 성공한 사람, 또는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영어에 enthusiasm이라는 말이 있는데 열광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도 ενθεος라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θεος는 하나님이란 뜻이죠. 그 앞에 εν이 붙은 것입니다. 엔은 전치사 인(in)입니다.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로 들어간다라는 말이 곧 열정 열광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있어서 성공한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아서 미쳐서 몰입하고 집중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신적 영감의 상태입니다. 베스도의 미쳤도다의 발언에는 유대주의 안에서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는 바울이 예수를 믿어  이 고생을 하는 것이 미친 짓이 아니냐는 의미도 있겠지요. 베스도도 바울이 박식한 학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미친다는 것의 동력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다른 것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그것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가기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던 시간의 간증을 자주하는 편입니다만 저는 많은 것을 버리거나 포기할 만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 대단한 헌신에 대해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만, 다만 여러가지 걱정은 있었습니다. 재정은 어떻게 할까? 가정은 어떻게 할까? 부모는 어떻게 할까? 이 길에서 조금씩 나아지지 않고 평생 결핍되고 가난하다면 과연 후회하지 않고 갈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질문에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과 걱정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고 그것에 대해서 쓰고 말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기쁨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막연히 그럴 것이다라는 기쁘고 보람있을 것이다라고 기대와는 다릅니다. 저는 이미 그런 일을 경험했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기회는 아닙니다. 청년부 리더만 해보고 주일학교 교사만 해보더라도 진지하게 설교와 공과공부를 준비하고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청년부에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전도한 새신자들에게 미숙하지만 성경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받은 은혜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혜 받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흔에 신학교에 갔던 것입니다. 버리고 간 것이 아니고 그것 말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개인적이고 이기적 동기로 헌신했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상태,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가 미친 상태입니다. 미쳤는가 미치지 않았는가. 그것이 소명의 확인이겠지요. 소명의 확인은 자신이 그렇게 미쳐 있는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것만 보여서 간 것이 헌신이라면 무엇을 포기했다느니 무엇을 드렸다느니 같은 과장된 자기연민의 간증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시작의 단계이지만 이 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저의 부족함 무식과 나태가 걱정일 뿐입니다. 그 일에는 미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정신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바울이 미친 것이 아니고 총독이 내 말을 미쳤다고 생각할만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총독과는 말을 끊어버립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에 미친 바울은 바로 시선을 이동해서 오늘 집중해야 하는 전도대상자 아그립바 왕에게 말을 겁니다. -26:27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합니다. 들을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선지자를 믿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의 존재를 믿는가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유대에서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토라 즉 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믿는다는 말이고, 선지자를 믿는다는 말은 선지서의 예언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선지서가 무엇을 예언합니까? 구약은 일관적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왕은 메시아가 올 것을 믿습니까라고 묻고 당연히 믿는 줄 압니다라고 자기가 대답한 것이지요.아그립바는 그것을 믿는 유대인이고 성전의 책임자입니다. 아니라고 하면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라면 선지자와 오실 메시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선지자를 믿는다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들어보지도 않고 알아보지도 않고 고민해보지도 않고 어찌 일언지하에 부정할 수 있는가라는 유대 왕에 대한 바울의 압력입니다.그리고 또 하나는 분명 이 말이 아그립바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이 옆에서 듣고 있는데 유대에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내란죄, 반역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곤란한 것입니다. 피의자 바울이 재판관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곤란하던 아그립바가 생각해 낸 말은 28절입니다.-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 발언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아그립바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고함질렀지만 아그립바 왕은 답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에 대한 아그립바 왕의 반응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판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결국 아그립바 왕은 아무 발언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상황이 끝납니다. 어떻습니까? 지혜로운 대응이고 안전한 위기 모면의 방식이 아닙니까. 이것이 이른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미치지 않은 사람입니다.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확고한 경험과 가치가 없어서 미친 사람이라는 취급은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잘 지키고 삽니다. 어떤 가치에도 미치지 않고 자신의 안전과 이익 안에서 안전을 지키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세요. 하나같이 정상으로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을 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사실 안 미치고 되는 일이 있습니까? 불광불급(不狂不及) 한국어로는 공교롭게도 미치다() 말과 미치다() 말의 발음이 같습니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지요. 저도 미쳤다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광신이라는 말은 싫어합니다. 미치는 것은 방향에 미치는 것이지 행동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수단에 미치지 말고 수단을 사용하여 인생의 목적에 미쳐야 합니다.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그것에 미쳐 살아야 정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는 뭡니까? 그것에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답할 수는 없는데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목적도 모르면서 경쟁하고 자랑하고 무시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면 세상이 미친 것이고 예수의 사랑에 미친 바울이야말로 정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미쳐야 볼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러브스토리입니다. 사랑에 미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 많은 피를 흘리며 사랑합니까? 누가 그 많은 죄를 다 용서해줍니까? 그것이 깨달아 지면 우리의 인생의 목적도 깨달아 질 것입니다.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복음에 미친 바울의 권면입니다.-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비록 세상의 상식이 우리의 예배와 선교를 미쳤다고 말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고 그것에 집중하는 믿음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