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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렌트 (Lent) 라고 하는데 렌트는 라틴어로 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과 봄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에 맞추어서 사도행전 강해를 잠깐 쉬고 사순절에 관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우선 사순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올해는 내달 4월 21일이 부활절입니다. 잘 알듯이 부활절은 기독교 전통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사순절이라는 것은 부활절로부터 역산해서 40일전, 그러나 주일을 뺀 총 40일간의 기간을 말합니다. 올해는 3월 6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고 그후로 10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 통합되어 있지 않던 신학적 과제를 정리하여 교회를 보편적인 공교회로 만들었던 회의입니다. 부활절과 사순절을 지키는 것도 이 니케아 회의에서 결의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절이 되기 전에 40일간은 평소에 즐겨하던 것을 금욕하고 절제하자는 의미에서 교회는 4세기부터 금식하며 사순절을 지켜왔습니다. 사순절이 지켜지던 초기에는 저녁이 되기 전까지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육식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생선과 달걀과 우유로 만든 음식도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런 금식의 전통은 15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역과 교파에 따라 부분적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사순절이 괴로웠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해서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한다는 의미로 수요일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라면 수요일부터 금식이 시작된다면 화요일 저녁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먹어야지요. 예전에 저녁부터 시작하는 금식기도회에 참가하면서 바빠서 점심을 못 먹고 참가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억울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원래 절제된 금식은 금식한 기간만큼 죽을 먹습니다. 만약 3일을 금식했다면 금식하기 3일 전부터 자극적인 음식을 줄이고 양도 줄입니다. 그리고 금식이 끝난 후에도 3일간 죽을 먹으면서 서서히 양을 늘려갑니다. 그런데 재의 수요일 하루 전날에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6주 동안은 고기를 먹을 수 없다. 그러니 오늘밤은 마지막으로 마음껏 고기를 먹어 두자” 그리고 고기 파티가 열렸습니다. 라틴어로 ‘고기’를 의미하는 말 ‘카니스’ 그리고‘안녕’이라는 의미의 ‘발레’라는 말을 외쳤습니다. 카니스 발레! 즉 “고기여 안녕’이라는 의미입니다. “아 나의 사랑하는 고기여, 6주 동안 너를 보지 못하는구나. 안녕, 고기야!” 고기를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카니스 발레! 이것이 카니발의 유래입니다. 우리가 흔히 축제라고 말하는 카니발은 이렇게 금식에 들어가는 사순절 전야에 고기 파티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럽과 남미에는 카니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이 카니발을 ‘사육제(謝肉祭)’ 라고 했습니다. 고기 먹는 것을 감사하는 축제라는 뜻이지요. 기근이나 가난 속에서 먹을 수 있게 된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종교적의 이유에서 사육제는 탄생했습니다.

 

그 축제기간은 길어졌고 곧 유럽전체로 번져갔고 세계의 축제로 정착했습니다. 카니발의 마지막 날을 프랑스어로 기름진 화요일 (마르디 그라스, Mardi gras, 肥沃な火曜日) 이라고 부릅니다. 고기 축제니까요. 생상의「동물의 사육제」라는 관현악을 좋아하십니까. 그것도 이 마르디 그라, 기름진 화요일의 축제를 위해서 만들어진 오케스트라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사순절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고기 파티를 재개했습니다. 수난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보다는 사람들은 고기에 대한 소망이 더 사랑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점심을 못 먹고 금식기도회에 참가했던 억울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운이 좋았던 적도 있습니다. 유학생 시절에 금식기도회는 일곱 끼를 금식하는데 금식이 시작되는 저녁시간 직전에 룸메이트의 어머니가 한국에서 음식을 보내왔습니다. 김치 등은 냉장고에 넣었지만 그 중에 떡이 있어 반강제로 제법 큰 떡을 한 덩이씩 입에 물고 금식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떡 한 덩이를 다 먹었더니 하루가 지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카니발에서도 그런 의미로 고기를 내장 안에 저장해서 이런 효과를 노렸을 것입니다. 굶는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카니발에도 참가하고 사순절의 금식에도 참가했습니다. 우리는 질문하고 싶어집니다. “고기가 좋으면 그냥 쭉 먹지 그럴 것을 왜 굳이 금식하는 겁니까?”그러나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때부터 신앙은 형식화되고 권력화되어 믿음의 이름으로 사람을 누르는 전체주의적 종교, 중세가 시작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카니발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어떤 면에서 인간의 본성이 그것에 반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카니발이라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쾌락에 빠져있는지 잘 아시죠? 카니발은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는 것뿐 아니라 더 자극적 쾌락을 요구하며 번져 나갔습니다. 노골적으로 음란한 축제 문화가 되어버린 곳도 있지요. 세계 최대의 축제를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이라고 합니다만, 일면 흥겹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광란의 축제입니다. ‘신데렐라의 밤’ 이라고 이름 붙인 밤에는 섹스 파티가 벌어지는데 몇 달이 지나고 나면 엄청난 수의 여자들이 낙태를 하고, 또 몇 달 후에는 카니발 베이비들이 태어납니다. 이렇게 태어난 카니발 사생아가 현재까지 1천 2백만명이랍니다. 대부분은 버려지고 빈민촌에서 부모없이 살아갑니다. 카니발에서 섹스파티를 벌이고 아기를 버린 사람들은 이듬해 다시 카니발에 또 참가했을까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음란한 쾌락은 인간성과 양심을 버리라고 요구하니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죄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받았는데 그 사순절을 기념하기 위해 고기를 먹지 말고 절제하자고 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고기 파티가 되었고 기어어 광란의 섹스파티, 아기까지 버리는 무책임한 놀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찌하여 사순절이라는 경건의 시간이 광란의 카니발을 만들어 냈을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과 쾌락은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카니발이라는 쾌락의 태생은 경건의 모양을 위해서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게 했던 사순절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치하지만“예수님이 좋아? 고기가 좋아?”라고 물어보면 다들“예수님이 좋아”라고 대답합니다. 비록 그것이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고기가 먹고 싶어져서 카니발을 벌리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경건과 경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십니까? 똑 같은 질문이지요. 취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욕심은 누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테르 브뤼겔이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있습니다. 브뤼겔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네덜란드나 유럽에서는 렘브란트, 고흐와 함께 나란히 평가받는 화가입니다. 관혁악을 만든 카미유 생상은 19세기, 사람이지만 브뤼겔은 16세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중세의 사육제와 사순절 광경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작품 이름이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입니다. 그림 왼쪽은 사육제를 즐기는 사람들, 오른쪽은 사순절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왼쪽에 사육제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고기를 굽고 있고, 고기를 들고 술통 위에 올라타 흥을 돋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먹어서인지 배가 불룩 나와서 음악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 오른쪽의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무거워 보이고 초췌해 보이고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카니발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끝나니까요. 그런데 제목은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입니다. 그림 안에서도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다. 브뤼겔은 사육제에 참가한 사람과 사순절에 참가한 사람을 대결시키는 것이 아니고,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앙과 현실 간의 치사한 갈등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경건의 요구와 탐욕의 요구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혹시 경건한 여러분에게서 돌발적인 타락과 쾌락을 탐하는 모습이 발견되어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신앙의 낙제가 아니고 신앙의 입구입니다. 완전하게 경건한 인간은 없습니다. 동시에 완전하게 경건을 거부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경건을 행하는 육체가 아닙니다. 언젠가 이 육체를 벗고 온전한 육체를 가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순절에 가져야 할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경건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몸으로 부활할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부활한 후의 육체에는 슬프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것들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에게 죄가 없을 겁니다. 죄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이 사순절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즉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통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죄의 삯이 지불된 것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로서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순절 40일 동안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무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금하기도 합니다. 하루에 한끼, 또는 일주일에 하루를 금식한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순절 기간 동안 먹지 않기도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텔레비전 금욕, 컴퓨터 게임 금욕, 스마트폰 금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 실천할 수 있으면 경건과 절제의 훈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반대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금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부활절을 기다리는 사순절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을 반대하고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은 사순절이 아니어도 많이 보면 좋을 것이 없고, 고기는 사순절이 아니어도 많이 먹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카니발이 아니어도 절제 없는 쾌락의 생활은 인간은 병들게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중요한 것이지만 사순절의 봄에 있어야 할 믿음의 주제가 아닙니다. 사순절은 경건의 도전이 아니라 부활의 기다림입니다. 부활을 위해서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절제와 금욕입니까? 아닙니다. 부활의 전제는 40일 금식이 아닙니다. 부활의 전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입니다. 십자가가 있어야만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오히려 어떤 것, 혹은 누군가를 맞아들여야 합니다.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 밖에 서서 노크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사순절이 되십시오. 교회는 천 년 동안 사순절에 고난을 묵상하기 위해서 점심을 먹지 않았고 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믿음과 양심이 있는데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맛있게 먹을 겁니다. 이번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내에게 주일 음식에 고기 반찬을 해달라고 특별 부탁을 했습니다. 아마 오늘 고기 반찬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중세의 사순절에도 주일에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양심에 걸릴 것은 사순절의 금식에도 참가하고 카니발의 음란의 축제에도 참가하는 일이겠지요.

 

사순절이라는 경건의 모양을 지키기 위해 카니발이라는 쾌락의 그늘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성도의 교제가 있는 기쁜 축제의 날로 만드는 것이 부활절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전통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 안에 있는 본질을 찾아서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전통을 물려받은 자들의 의무입니다.
다만 고기를 드시면서 이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그때는 먹을 것으로 욕심부리지도 않을 겁니다. 극단적이며 음란하고 광란에 사로잡힌 카니발은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사육제 자체를 비난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사시간 동안에는 생상의「동물의 사육제」를 감상하시겠습니다. 고기 드시고 건강한 몸과 신앙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