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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12-35

지난주 설교에서 천부장은 바울의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이 변론하는 중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전통적이며 종교적 신념을 자극하면서 공회에 내부분란이 일어났고 결국 공회는 난장판이 되어 버립니다. 재판이라고는 볼 수 없는 난폭하고 과격한 것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를 염려하여서 바울을 영문 안으로 피신시켰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유유히 안전한 곳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유대인들은 더 분에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은 자치정부,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과 서기관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와 공모하여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이라는 사람들이 종교지도자인 제사장과 장로들과 결탁했고, 법과 사회정의를 다룬다는 산헤드린 공회, 최고법원까지도 그들과 함께 암살음모를 공모한 것입니다. 자원한 암살단 40여명은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선언했습니다. 바울이 모르는 동안 죽기를 각오하고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천부장이 이 정보를 듣게 됩니다. 바울이 살기 위한 노력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천부장은 그 밤에 즉시로 군사작전을 전개합니다. 밤 9시에 무려 470여 명의 대대급 군대를 동원해서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암살단은 한끼도 굶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 천부장 입장에서는 재판중인 사람이 암살당하면 곤란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야간에 470명의 군대를 동원한 것이 천부장이 골치아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가 시민권자에게 안전하게 재판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켜주는 법치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만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려는 부패한 종교사회에 대해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시민권제도를 통해 바울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의 야만성,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로마의 법과 제도가 슬프도록 모순적입니다.

경제적, 시간적 이익보다 우선해야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인간다움이 손상당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최근에는 한국 사회에 ‘죽음의 외주화(死の外注)’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충분한 안전장치를 하지 않은 위험한 일에 외부인력을 쓰고, 사고가 나면 책임을 지지 않는 비양심적이고 반인륜적 고용형태입니다. 그것에 침묵하고 따라가는 사회구조입니다. 안전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돈까지 이익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삼는 야만적인 사회의 갑질입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하는 사람의 안전도 무시하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의 생명조차 희생시키는 사회, 한국은 오히려 2000년전의 로마의 시민권리에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로마의 법치주의는 한 명의 시민권자의 안전과 권리를 위해 470명의 군대를 야간 이송에 동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외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번주 본문은 바울을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로 시작되지만 지난주 본문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하십니까?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 말씀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시는 다음 사명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 따라 바울은 이 암살계획에서 벗어나 기어이 로마로 가게 될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죽이려고 하던 야만적 종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선교의 의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사명이 될 때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에 이루어 질 것입니다.-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 빌립보서의 이 ‘소원’에 엑센트를 주고 읽어서인지 무언가 소원이 생기면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소원이 사명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이 인간의 소원이 되어서 행하게 것이 사명입니다. 이 문장에서 ‘사람의 소원’이라는 절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절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받았으므로 이 암살단에 의해 죽지 않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라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지요.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리빙스턴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병에 들었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선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꼭 회복할 것입니다”고 위로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위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라도 선교사라도 또는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예기치 않은 질병과 사고로 인해 죽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말은 어떤 경위일까요?
리빙스턴은 30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을 세 번이나 횡단하면서 60만 명 이상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고 하는 선교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인물입니다. 중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편전쟁이 일어나서 못 들어가게 되었고, 서인도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 길도 막혀서 못 가게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의 계획은 아프리카가 아니었지만 결국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고 그것이 아프리카 선교의 시작이 됩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뿐만 아니라 인격을 도둑질하고 거래하는 노예무역을 없애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을 했던 선교사입니다. 열병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적도 있고 원주민들은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사자에게 물려서 어깨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기자들이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는 리빙스턴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부인하는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명이 있기 때문에 결코 안 죽는다”가 아니고, “지금 살아 있으니 나에게는 사명이 아직 남아 있다”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의 사명인식도 이것입니다. 이 특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암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 간증은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선교의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가 리빙스턴이라면 20세기 중반에는 짐 엘리어트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사후에 발견된 엘리어트의 일기장에는 이런 신앙고백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엘리어트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인생 안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자신의 삶이 완전 연소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리빙스턴도 엘리어트도 죽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이질에 걸려 죽었고, 엘리어트는 아마존의 원주민의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들의 숨이 멎을 때 사명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명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품은 사명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다면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무역 근절을 위해 싸울 때 아브라함 링컨이라는 사람은 대통령으로 미국에서 싸웠습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려고 했던 링컨은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미국에서도 자유와 평등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진전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믿음이 다 그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듯이 남북전쟁의 남군과 북군이 다 기도를 하고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노예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적들도 기도를 하고 전쟁에 나왔습니다. 각자가 서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니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줘야 합니까? 누군가에는 기도의 응답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이 되겠지요. 누가 더 큰 소리로 기도하는가, 누가 더 간절히 기도하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되겠습니까? 여기서 링컨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노예제 폐지라는 것은 전쟁이 끝났다고 일시에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링컨이 해야할 일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이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곧 암살당했습니다. 링컨은 살아 생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암살자의 손에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분명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링컨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하나님의 편에 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링컨은 사명이 있는 동안 결코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편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하나님 편이십니까?” 내 이익을 위해서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까?

이번주 아침기도도 요한일서를 계속 이어서 설교했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다시 읽었습니다만 4장 7절부터 21절까지 헤아려보니 사랑이라는 단어가 30번 반복됩니다.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신학의 결론이고, 신앙과 사명의 본질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는 나를 둘러싼 모든 이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선명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옆에 선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제 옆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편에 선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리빙스턴이 노예무역을 전부 근절시키지는 못했지만 리빙스턴은 하나님의 편 즉 아프리카의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서 사명을 다한 사람이었고, 링컨은 암살당했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서 고난받는 형제의 자유를 위해 사명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죽고 없지만 분명히 그들은 사명이 다할 때까지 죽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내 편이 되어주세요. 그래서 저 사람 좀 혼내주세요”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하는 대상이 되고 곧 우리의 사명은 시작’됩니다. 바울도 로마에서 목이 잘려 죽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사명이 다하고 나면 죽음을 맞이하겠지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바울을 죽이려고 하지만 바울은 로마에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소식, 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일을 맡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날까지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그 일을 깨닫고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칼 힐티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잠 못 드는 밤에 고민하는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 사명은 무엇에 근거해 있습니까? 리빙스턴, 엘리어트, 링컨, 그리고 바울의 인생을 움직인 원동력은 하나님과 약속한 사명이었고, 그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랑해야하는 믿음에 근거해 있습니다. 사명은 ‘살아 있는 동안에 내가 있어야 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증거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사랑의 사명과 선교의 사명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있는 동안에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19년 1월 20일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 주일예배 설교 조용길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