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후서 4:9-13,21,22
설교 조용길 목사

지난 번 9월에 사도행전의 마지막 본문으로 설교를 마쳤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다른 강해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사도행전 이후의 바울의 선교의 여정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하고 나서 사도행전을 마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이 아무런 마무리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좀 정리를 하고 싶어서 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도행전에 여운이 많았기 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누가는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었습니다. 정해진 결론, 답을 받는 것보다 질문을 받는 것, 과제를 받든 것, 그것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역사적인 정황의 이해, 인물의 내면, 그리고 그런 것들과 관계하고 있는 주위 상황과 환경을 묵상하고 해석하는 여지가 필요합니다. 만약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면 성경은 율법조문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이지요. 명령형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게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을 처벌하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율법의 조문을 우리 머리 안에 구겨 넣는 법전이 아닙니다. 삼라만상의 깨달음도 아닙니다. 성경 안에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고 그 이야기 안에 하나님의 메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거짓과 탐욕과 살인까지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이야기를 이루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성경과 자신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피동적인 신앙은 하나님에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소극적인 신앙은 무언가를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은 언젠가는 지치고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아도 그 사람이 대답하지 않고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오지도 않는다면 관계는 성립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 소극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것에 대한 의지적이고 인격적인, 전인적인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문자로 되어 있지만 그 문자는 배경을 가지고 쓰여 졌다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사람들과 얽혀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문자는 맥락을 따라서 이해해야 합니다. 텍스트는 컨텍스트를 이해할 때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맥락을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시대의 사회상이 잘 반영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를 보니까 언론에게서 받는 텍스트를 일단 이해하고 나면 그 텍스트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규정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학력은 높은데 지성적이지 않습니다. TV와 유튜브 뉴스를 몇 편을 듣고 나면 간단하게 그 관점으로 학습되어 버립니다. 학습이면 괜찮지만 때로는 선동이고 세뇌가 되기도 합니다. 남에게 결론을 맡겨 버리는 습관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고자 하시는 여러분, 분별은 미덕이 아니고 생명 같은 것입니다. 논리적이라고 하는 설득을 믿지 마십시오. 논리 없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에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가 반드시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다양성’에 근거해서 반대편에서 서 보는 용기와 겸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객관성’에 근거해서 상황을 냉정하게 이해해 보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인간성’에 근거해서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의 경우와 도리라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적’이라는 말은 일단은 숨겨두십시오.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성’과, 근거를 확인하려는 ‘객관성’과, 다름을 인정하려는 ‘포용성’을 가지지 않은 채 성경을 해석한 사람의 것을 우리는 ‘성경적’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컨텍스트를 읽으려고 하지 않는 몰이해 때문에 우리 사회는 갈등하고 반목하고 있습니다. 관심은 다 많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논리로 이해 했기 때문에 공감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것입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했다고 해서 믿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경험하고 공감해야 통찰과 분별의 힘이 주어집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맥락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공감한다는 의미에서 사도행전의 끝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28장 31절의 마지막절을 보면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로 끝납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기술하면서 사도행전은 끝이 납니다. 과거완료도 아니고 미래완료도 아닙니다. 현재진행으로 끝이 났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강력한 결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것을 읽는 사람도 현재진행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고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고 오늘 지금의 이야기로 공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화는 끝나고 나면 속편이 나올 것을 예감할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의 속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편에서 주인공은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전도자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퇴장합니다. 바울이 주인공이 아니고 성령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성령은 여전히 주연으로 지금 우리의 시대에서 사도행전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선교는 2천년 역사와 함께 강처럼 흘러왔습니다. 선교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과 방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아무도 그 흐르는 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말도 아니고 저의 기대도 아닙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사 안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온 선교를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고 인간들이 살아온 역사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기회들 중에 여러분에게 선교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이 끝나고 있는 시점의 배경은 60년대 중반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27권을 마무리하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이 납니다. 요한계시록도 아직 끝나지 않은 문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야 끝이 납니다. 요한계시록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로 끝납니다. 이것도 기다림이라는 현재진행형으로 끝납니다. 사도행전이 끝나고 요한계시록이 예언하고 있는 종말 즉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재림, 그 사이의 모든 시간이 현재진행형으로 선교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 29장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제 나이가 많이 들고 고생을 많이 해서 사도행전 전반부를 읽을 때의 느낌과 좀 다릅니다. 건강은 괜찮은 지 걱정이 됩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이후에 어디있는지 모르던 바울을 디모데 후서에서 다시 발견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 바울의 사역도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신서와 역사의 기록을 통해 바울의 이후 행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끝난 후에 바울은 재판을 받고 무죄석방이 됩니다. 가택연금생활에서 벗어난 바울은 다시 광범위한 순회 선교 사역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63년부터 66년까지 마케도냐와 소아시아의 교회를 돌아보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 사이에 네로는 광기의 폭군이 되었고 기독교인에 대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박해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머물고 있던 마케도냐의 총독은 네로에게 아첨하기 위해 혐의도 없는 바울을 잡아 로마로 압송했고 바울은 다시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1차 투옥 때의 가택연금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하감옥이라는 혹독한 환경이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던 감옥에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인 바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 후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로마로 와 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4:21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고 당부합니다.

디모데 후서를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바울은 죽음을 직감하고 있고 순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오라고 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 9절 이후부터는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외로웠습니다. 물론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디모데가 보고싶었고 그 디모데와 마지막 만남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4:13에는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계절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있던 지하감옥은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겨울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춥고 습한 지하 감옥에서 입고 있을 겉옷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갔을 때 날씨가 더워져서 가보 집에 맡겨 두었던 바울의 외투를 찾아서 가져와 달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는 2백키로가 넘습니다. 디모데는 외투를 가지러 드로아에 들렀다가 로마로 갔을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 디모데가 로마에 도착하기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한달 이상은 걸렸을 것입니다. 추위에 고생하고 있을 바울을 생각하면서 로마로 향하는 디모데의 발걸음은 얼마나 급했을까요.

인간에게는 크게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의식주가 필요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고 휴식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악인에게도 주시고 죄인에게도 주시고 하나님에게 욕하는 사람에게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다움이 만족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이 필수요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요- 마4:4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두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인지 또 다른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성경 필사본이나 그에 준하는 서적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가져다 준 외투를 입고 그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읽었을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그렇게 사모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천국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지하 감옥에서 외투 하나를 입고 감사의 기도를 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시간을 보내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네로의 대박해 때 68년에 바울은 순교했습니다. 그와 같은 해 바울을 죽인 황제 네로도 스스로 죽었습니다.

오늘이 10월 20일, 어느덧 가을입니다. 더웠던 여름 내내 시원함을 찾아 헤맸었는데 어느새 추워져서 이제 따뜻함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은 짧을 것이고 이제 곧 들이닥칠 겨울을 준비해야 합니다. 외투를 꺼낼 때가 되었습니다. 외투는 우리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2백키로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지 않아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싼 코트와 난방만으로는 영혼을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삶을 좀 정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을 따뜻하게 할 외투를 꺼낼 때 영혼을 따뜻하게 할 하나님 말씀도 함께 꺼내십시오. 그것이 두번째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온도는 몇 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의심의 여지없이 36.5° C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번째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나눌 체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렇게 모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금방 따뜻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열정의 온도는 36.5°C로 충분합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종교적 열정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해서 외투와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을 때 아마도 가장 설레임으로 기다린 것은 외투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였을 것입니다. 외투에 묻어 있는 디모데의 체온이었을 겁니다.

오늘은 우리 예배를 두개의 예배로 나누는 날입니다. 두 개의 예배로 분리하면서 8개의 소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소그룹으로 작은 모임을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과 가사와 육아로 바쁜 것은 알지만 믿음의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번 두어 시간 정도의 믿음의 모임조차 가질 수 없이 바쁘다면 우리는 그 바쁨을 미워하고 거절합시다. -10: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모여서 체온을 나누고 은혜를 나고 믿음을 나누십시오. 차도 나누고 음식도 나누십시오. 겨울이 오기 전에 외투와 난방을 준비하여서 평화롭고 행복한 겨울을 준비합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말씀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준비도 해 주십시오. 은혜는 목사의 설교 안에 있지 않고 여러분이 믿음의 교제를 시작하면 그 안에 이미 풍성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주체자가 되십시오. 그것을 나누면 더 커집니다.

바울이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에게 외투와 성경을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처럼 2019년 남은 시간을 말씀과 믿음의 이웃과 함께 하십시오.-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속히 오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냈던 유서 같은 편지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인사로 설교를 마치겠습시다. -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