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1월5일 「공동체의 성장과 일치」 에베소서 3:17-19
2020년 새해에 처음 맞는 주일예배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0년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이전과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입니다. 지난12월에 큐티를 성실히 한 분들은 에베소서를 다 읽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중에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기도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만일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에베소에 가서 에베소 성도들을 직접 만나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투옥 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없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지식은 가르치지만 사람 마음은 못 바꿉니다. 가르쳐야 할 것이 있고 기도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드린 이 기도의 동기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면 에베소교회의 상황과 만날 것입니다. 14절 15절에서 바울은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서로 다른 차이와 그것으로 인한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바울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다양성은 중요한 현실이고 교회의 일치는 또한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딪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즉 다양성 안에서 연합과 일치라는 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성원의 다양함을 말하고 그리고 이어지는 15절에서는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한다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의미는 14절(한국어13절)의 각 족속과 관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말하는 사랑 가운데 뿌리내리고 터가 굳어져야하는 믿음도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각 족속이라고 하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건강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 교회는 안정하고 정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상황과 3장의 문맥을 볼 때 이 본문이 말하고자는 하는 핵심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일치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3:17 こうして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信仰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心のうちに住んでい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また、愛に根ざし、愛に基礎を置いているあなたがたが、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제가 치바의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작은 화단의 나무를 옮겨심은 적이 있습니다. 옆 건물에 가려 빛을 못 받고 지나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교회 앞쪽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흙을 깊이 파서 뿌리는 파내고 다시 옮겨심을 자리에 그만큼의 깊이와 넓이만큼 흙을 파냈었습니다. 파내고 나서 흙을 다지고 물을 주어서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곧바로 시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주어도 안되고 잎이 마르고 떨어지더니 꼭 죽은 나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매일 물을 주고 얼마간을 애써보다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마른 나무는 죽은 것처럼 겨울을 그대로 지내고 이듬해 봄이 되니 다시 연한 순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죽은 것 같았지만 그 동안 뿌리는 계속해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왜 성도들의 신앙을 뿌리로 이야기 했을까요? 바울이 뿌리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이런 은유를 했을 것입니다. 신앙의 뿌리가 내린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옮겨온 나무가 뿌리내리기는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뿌리를 뽑아 옮겨 심는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같은 은혜를 받아도 옮기워진 나무는 뿌리가 정착하지 못해서 그 은혜를 얼마 흡수해 내지를 못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못 먹는 동안에도 있는 힘을 다해 뿌리는 내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흙에 적응을 하고 실뿌리들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나무의 화분갈이를 할 때는 뿌리에 들러붙어 있는 흙을 같이 옮겨줍니다. 토양이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충격과 혼란입니까?
저도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 심기워진 뒤에 뿌리내리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도망가려고도 해보았지만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았을 때 그 토양에 적응하려고 애썼습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이 전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항상 충격과 혼란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옮길 때도 그랬습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시들어가다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주의의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에서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이 신앙과 삶을 이중적으로 분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한 방법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아무리 길게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이 성장하거나 성숙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서는 안되고 자기를 버려야만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싸워야하는 시간도 부족한데 스스로 자기를 속이면서 신앙이 뿌리내리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은 시들어 버립니다.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그들이 공동체에 뿌리가 박히기를 기도했습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다고 할 때 그 나무의 뿌리를 잡아주는 것은 흙입니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질적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에게도 흙에게도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만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토양도 긴장하고 이미 기존에 있던 뿌리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리스크였을 것이고 일상에서도 불편한 일입니다. 그들의 토양은 다릅니다. 언어도 문화도 전통도 생활도 먹는 음식도 다 다르니다. 불편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뿌리를 내리되 사랑 가운데서 뿌리를 내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이질적인 것을 받아주고 불편한 것을 서로 감수하는 배려심입니다. 에베소교회는 계시록에서 책망받는데 첫사랑이 식은 이유였습니다. 처음 사랑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랑이 약해졌다는 의미뿐 아니라 서로 배려하는 사랑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사실 두개가 같은 말입니다. 성도 안에 사랑이 있어서 자리를 내어주고 함께 어울러져서 그 토양에 적응하게 해야합니다. 사랑의 배려와 친절이 없는 곳의 뿌리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 무궁화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그 나무는 원래 화분에 심은 나무인데 나무가 커지면서 목이 말랐는지 뿌리가 화분바닥을 뚫고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땅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뿌리가 얼마나 수분을 갈급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사람의 손처럼, 물을 찾는 사슴의 목처럼 나무 뿌리도 물기가 있는 곳으로 뻗어나갑니다. 그 뿌리에게 있어서 물기를 머금은 흙의 조그만 친철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나무가 뿌리를 내릴 때 터가 굳어질 것을 기도합니다. 물론 여기서 뿌리내리는 사람은 이방인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장에서 보면 이방인이라는 것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아직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아직 폐쇄적이어서 뿌리 내리기를 도와주지 않아서입니다.
지진이 나면 대나무 밭에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나무 뿌리가 아주 깊이 내립니다. 모죽이라는 대나무는 5년간 뿌리만 내리다가 어느 날부터 하루에 70센티씩 자라기 시작해서 한 달 동안에 30미터까지 자랍니다. 그 길고 가느다란 대나무가 부러지지 않고 서있는 것은 뿌리가 견고하게 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땅 밑을 들여다 보십시오. 뿌리가 다른 대나무의 뿌리와 함께 얽혀있고 그 사이로 흙이 견고하게 그것들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터가 단단한 것입니다. 땅이 갈라질 만큼의 큰 지진이 나도 대나무 밭은 그 뿌리의 견고함과 토양의 단단함 때문에 갈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것과 변화하는 것을 거부하면 뿌리내리는 일도 터가 단단해지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기존에 있던 나무 뿌리사이로 새로운 나무들의 뿌리가 들어와 정착해야합니다. 맑은 물은 담아 두면 수정처럼 아름답지만 곧 탁해지고 벌레가 생기고 썩고 맙니다. 이치는 같습니다. 두렵고 불편하더라도 물은 다양한 환경을 만나면서 흘러가야만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은 새롭게 옯겨 심은 대나무 한그루에게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작은 나무 한그루는 새끼발가락 하나만 걸쳐도 그 뿌리들의 얽힘과 흙과 일체된 환경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터가 굳어진다는 것은 곧 토양을 공유하게 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터가 굳어진다는 건축적 용어는 상부구조를 세우기 위해서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기초를 확실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반이 약하면 건물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기초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배려와 포용입니다. 뿌리가 견고하면 나무를 세울 것이고 나무는 가지를 뻗고 기어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수분을 공급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교회의 토목공사는 개방성과 포용성입니다. 또한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적응하려는 노력과 인내입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예배와 선교를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그 배경도 다양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장과 확장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분열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려고 하고 뿌리가 섞이지 않으려고 하면 분열이 일어납니다. 하나가 차고 나면 금새 둘로 나눌려고 하는 분열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분열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흙을 공유하고 뿌리가 같이 얽히도록 배려하는 개방성과 포용성입니다. 개방하고 포용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터는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질 것을 기도합니다.
가까울수록 더 예의를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서로의 배려는 곧 서로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2:7 キリストの中に根ざし、また建てられ、また、教えられたとおり信仰を堅くし、あふれるばかり感謝しなさい。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과 다른 형제를 향한 사랑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의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도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에베소서 교회론의 진수입니다. 소수의 헌신이 아닌 공통의 배려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눔과 개방의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임하십니다. 우리는 많아지면 나누어진다는 인간의 죄된 법칙에 저항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에 손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020년 우리는 확대해 갈 것이지만 오히려 배려하는 속사람은 성장할 것입니다. 확장해 나가지만 서로 사랑하는 성숙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내린 뿌리를 보십시오. 흙과 뿌리 사이에 틈이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뿌리들이 그 사이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하십시오. 예배에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의 소그룹 모임에 앉을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그렇게 얽히고 나면 교회 공동체의 기초는 든든해집니다.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내립니다. 2020년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뿌리를 내리고 기초를 든든히 하는 예배와 선교를 위한 선한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