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0月27日
「마지막 수업」
디모데후서4:4-8
설교 조용길 목사

사도행전 이후에 바울의 행적을 찾아보면 디모데후서를 통해서 바울이 1차로 석방된 후에 다시 2차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1차 투옥과 2차 투옥 사이에 선교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주어진 선교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시기적으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것보다는 이미 개척된 교회를 돕고 든든하게 세워가는 것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가면 마케도냐, 다시 남쪽으로 가면 소아시아에는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때에 개척한 교회 빌립보 에베소 등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1차 투옥 석방 후에 바울은 마케도냐와 소아시아로 가서 교회들을 순회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케도냐와 소아시아의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로마에서는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바울은 붙잡혀서 다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됩니다.

바울이 체포될 때의 계절은 겨울이 오기 직전의 우기였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추운 계절입니다. 바울은 습하고 추운 지하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디모데에게 옷과 책을 가지고 직접 로마의 감옥으로 오라고 당부합니다. 추웠기 때문에 옷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 책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그것들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은 아들 같은 디모데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설교 내용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설교했습니다. 큐티를 시작하십시오. 작은 모임에서 말씀을 나누는 믿음의 실천을 시작하십시오. 그래서 일상의 따뜻함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믿음의 사람과의 나눔이 있는 영혼이 따뜻한 겨울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정정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만나서 외투와 책을 전해주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만, 몇몇 자료에 의하면 바울이 죽기 전에 디모데가 로마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디모데가 드로아까지 가서 바울의 옷을 찾아 로마로 출발했지만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디모데가 로마에 도착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겨울이 다가오는 로마의 감옥에서 추위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디모데를 만나지도 못하고 끝내 참수형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디모데는 바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남겨진 외투를 끌어 안고 울었겠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같은 바울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추위에 떨게 하고 마지막 순간도 함께 하지 못한 것도 고통일 것입니다. 그 어느 쪽이라도 슬픔을 이기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고 복음을 얼마나 자랑했는지를 누구보다 디모데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디모데가 바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에 대한 인상은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찾아보니 2017년 2월에 14장을 설교했었는데 디모데의 고향은 루스드라입니다. 디모데가 어렸을 때 이 루스드라까지 전도하러 왔던 바울이 테러를 당해서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과격한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때리다가 이제 죽었다 하여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살아나 루스드라의 성도들에게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 피투성이 전도자 바울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분은 왜 저토록 고통받으면서까지 예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저 분으로 하여금 목숨까지 걸게 하는 것일까?’ 그 질문은 곧 ‘예수는 누구이고 복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바울의 삶은 어린 디모데에게 그러한 질문을 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는 곧 바울을 다시 한 번 더 만납니다. 기억하십니까? 바울이 더베로 갔다가 배를 타고 예루살렘 안디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배를 타지 않고 다시 역순으로 육로를 걸어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방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루스드라, 이고니온이 어디입니까? 바울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까. 바울은 안전하지도 않음에도 그곳에 다시 돌아왔던 이유는 거기에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 루스드라의 작은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자신의 안전보다 이것을 더 걱정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런 바울의 모습을 디모데가 보았습니다. ‘이 작은 모임이 무엇이라고 목숨을 걸어야 되는 여기에 다시 온 단 말인가? 이 분은 왜 이토록 교회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디모데는 복음과 교회를 사랑하여 목숨을 걸고 선교하던 그 젊은 날의 바울을 기억합니다.

그야말로 헌신이지요. 헌신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학교 가는 것으로 헌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요. 복음과 교회를 위해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헌신자입니다. 그리고 좀 무섭고 엄한 말입니다만, 그 헌신의 진위는 헌신의 삶을 통해서 다음 헌신자에게 그 헌신이 이어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매론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협박이나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진짜는 진짜를 낳기 때문입니다. 원칙과 질서를 말씀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디모데라는 열매를 봤다면 바울이라는 나무는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 자신의 영역 안에 믿음을 가두어 두고 살다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을 너무나 좁은 곳으로 가둔 것이 아님니까. 믿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의 속성은 유기적이고 역동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범위는 어디까지 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이어져야 하고 그 이어지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역사성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우리의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선교는 헌신의 계승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헌신하지 않는 다음 세대의 문제가 아니고 현세대의 문제입니다.

물론 당연히 헌신이라는 것은 예수를 쫓는 일이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리는 것이지겠만 그 헌신의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해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등을 보이는 앞 선 세대입니다. 예수의 헌신은 그 다음 헌신을 일으켰습니다. 사도들이 그것을 보고 체험하고 헌신되지 않았습니까. 그 헌신을 보고 교부들이 헌신하고 그 흐름은 끊이지 않습니다. 헌신으로 밀어 내지 않아도 헌신의 등이 있다면 헌신은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외없이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위해서 사람의 믿음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위해서 사람의 헌신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서로 교통함, 교제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에 있어서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이든 헌신이든 그 일을 하는데 매개로써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믿음을 낳고 헌신이 헌신을 낳는 것입니다.

디모데도 바울이 순교하고 나서 30년간 에베소에서 목회하다가 스승 바울이 맞던 것처럼 그렇게 폭행당하여 순교했습니다. 바울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의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목격한 사도요한이 예수의 죽음을 보고도 세상으로 돌아가 살 수 있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바울의 곁에 있었던 누가가 바울의 헌신을 보고도 세상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디모데가 바울 이후에 믿음에서 떠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들에게 헌신이라는 말은 이미 무의미한 것입니다. 자석에 철이 달라붙듯이 다음 헌신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살아있어도 믿음이 안되는 경우가 있지만 죽어도 여전히 강력한 믿음인 것도 있습니다. 바울의 이 믿음과 헌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살면 영향력을 서로 주고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헌신자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그 교회가 헌신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교회의 자립이라는 것은 재정 자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하는 성경교사의 직분은 중요한 것입니까? 목회를 해야 하는 목사의 역할은 중요한 것입니까?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신학과 신학자는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을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교회는 마땅히 우수한 인재를 목사로 양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 헌신된 성도들을 배출해 내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자립입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여기서 예수님을 전하고 여기서 성경을 가르치고 여기서 세례를 주고 여기서 같이 예배하고 여기서 헌신한 사람들 중에 탁월한 사람을 선발하여 다음 담임목사로 세웁시다. 그래야 자립된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세우려면 그런 믿음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방해와 박해는 많을지라도 믿음은 믿음을 낳고 헌신은 헌신을 낳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결핍과 방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박해는 없지만 믿음과 헌신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남이 1차 전도여행이었고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루스드라로 찾아가서 디모데를 선교사로 픽업합니다. 요즘 수요기도회 설교는 마태복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설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건너 마을의 새끼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십니다. 그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크고 빠른 말이 아닙니다. 작은 나귀 중에서도 사람을 태워본 적도 없는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작은 것에 탈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누가 그것을 내어 주겠습니까? 망설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왜 남의 나귀새끼를 풀어 가지고 가느냐고 물어보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신다는 말에 나귀 새끼를 보내주었고 예수님은 실제 그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디모데는 마치 새끼 나귀 같았고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 같았습니다. 주가 너를 쓰시겠다 하여 디모데를 픽업하여 선교여행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때부터 디모데에게 있어서 바울은 아버지가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소용되어질 사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길었던 선교의 여정이 지나고 이제 사도 바울은 단두대로 향합니다. 죽음의 시간입니다. 디모데가 도착했든지 도착하지 못했든지 바울이 디모데를 부른 것은 바울에 의한 디모데의 제자훈련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과목이 남았습니다. 바울은 기둥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 기둥에 이미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둥은 장검이나 도끼로 내려쳤기 때문에 이미 깊이 패어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자리에 머리를 대고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의 이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순교의 자리는 디모데에 대한 마지막 성경공부시간인 셈입니다. 헌신을 본 사람만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끝난 후 찾아낸 바울의 마지막 선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사라지지만 이 헌신의 영향력은 2천년을 이어왔고 지금도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헌신자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목이 잘려 순교합니다. 이런 질문은 없으십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살려 주시는 것인 줄 알았는데 믿음으로 저렇게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저렇게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라고…믿음은 연명치료장치가 아닙니다. 믿음은 평안 속에서 죽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힘입니다. 믿음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과연 천국은 믿음과 소망으로 가득한 곳일까요?

아닙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소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믿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필요합니다. 영화 바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바울이 죽은 후에 천국에서 바울을 마중 나온 만난 사람들을 만납니다. 바울이 그 중에 한 남자의 얼굴에 손을 대고 인사하는데 그가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바울이 박해자 사울일 때 자신이 죽였던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죽임 당한 순교자들입니다. 천국은 용서와 사랑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믿음으로 소망하는 사람은 이 땅의 소망을 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부터 시작된 이 헌신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바울은 죽음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익함을 웅변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강력하게 마지막 설교로 가르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진실한 모습은 누군가에게 설교이고 성경공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누군가에게 믿음의 선한 영향이 되기를 바랍니다. 헌신의 끈을 이어가야 하는 그 선교의 사명을 붙드는 교회와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