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0月13日 主日礼拝
「바람을 타고」

요한복음3:8
설교 조용길 목사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서 가족과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간밤에 큰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어제 밤에는 그렇게 무섭던 자연이 오늘은 이렇게 아름답네요. 야외예배를 강행할 것인지 취소하고 연기할 것인지 많이 고민했는데 결국 야외예배는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판단 부족으로 예배에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오늘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겠습니다. 예배준비를 위해 봉사해주신 분들과 참석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어제는 기록적인 태풍에 지진까지 있어서 무서웠습니다. 자연의 한 작은 조각으로서 겸허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간밤에 태풍으로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성경에도 바람이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는 전도서의 허무한 바람이 있는가 하면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이 임하실 때의 뜨거운 불길같은 바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이 바람을 비유로 가르치신 곳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대화할 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바람은 항상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묘사된 것 같습니다. 실제 바람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 니고데모의 바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유력한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호기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오픈마인드와 겸손함을 가진 사람 같습니다. 자신이 속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기반에서는 예수님의 존재를 경계하고 적대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사회적 입지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한밤중에 몰래 찾아왔습니다. 그다지 당당하거나 공개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라도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는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생명과 진리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이런 니고데모들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교회까지 나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마도 역사 안에 제도화된 교회의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전도를 방해하고 있는 제일 방해세력은 교회니까요.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두려움을 가지고 니고데모들을 위한 예수님의 방처럼 누군가가 열린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이유는 인생 앞에서 겸손해지고 세상 앞에 솔직해지고 보면 당연하게 나오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진리를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먹을 것이 있을 때는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는 다시 대세에 편승해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를 저주했고 예수를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등장하는 디고데모는 아리마대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 사후에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룬 사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입니다. 제자들조차 다 도망가 버린 때에 반역죄로 죽은 사형수의 시신을 받아와 장례를 치룬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할 뿐 아니라 니고데모가 그만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야 할 때 유일하게 그 자리에 남아있던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을 할 용기도 실력도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제도권에 남겨 두셨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일을 소상하게 요한복음에 기록했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요한에게서 니고데모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니고데모는 “다 큰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대답하십니다. 니고데모는 물리적 한계 안에서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까? 그것이 어찌 가능합니까?” 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육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영을 말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언어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 말이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육체는 모체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지만 영으로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낡아가고 늙어가고 약해져 갑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강조하여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영은 약해져 가는 육체를 가지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임종 직전이라도 영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회는 육이 살아있는 동안입니다. 이것이 본 어게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나쁜 짓 하지 않은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과 듣는 것에 익숙하지만 그것이 본 어게인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성과 과학의 세계에서는 영의 세계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성과 과학의 치명적인 무지입니다. 보이는 현상이 전부이겠습니까? 이 말이 들리는 사람이 있고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도 처음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영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영을 믿으십니까? 영의 존재, 영의 세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학자이고 공회원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유대사회에서 우월한 사람입니다. 타락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개과천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본 어게인’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니고데모에게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본 어게인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그 이해는 지적 이해를 넘어가는 영적 이해입니다. 보이는 것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이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여기서 바람 비유가 나옵니다. 바람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바람이 일으키는 일들은 눈에 보입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성령이 하시는 일은 보입니다.

성령을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합니다. ‘바람’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성령으로 난 사람은 ‘프뉴마토스’ 즉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공기가 이동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입니다. 공기 이동이 없으면 바람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옵니다.

적도에서는 태양열에 의한 열에너지가 너무 뜨겁고 극지방 같은 고위도 지방에서는 열에너지의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이 열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대기와 해양의 순환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태풍입니다. 태풍이 분 다음 날 날씨가 쾌청한 것은 공기를 이동시키는 바람 덕분입니다. 우리는 어제 지나간 바람 때문에 바다에서 올라온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습니다. 어제 바람을 경험했지 않습니까? 누가 그것을 말릴 수 있었습니까?

바람은 바람이 원하는 대로 붑니다. 바람은 사람의 원대로 불지 않습니다. 사람이 바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저 부는 바람을 맞이하거나 피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원대로 불지 우리의 원대로 불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불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임의로 성령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성령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는 사방이 막히고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몰라 방황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기력과 절망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정말 그 기도 말고 다른 기도는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 나는 지금 어두운 바다에 홀로 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노를 저어가고 싶지만 어디로 노를 저어야 할 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열심이나 결단이나 성실과 같은 단어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내 등을 밀어준다면 그때는 내가 가야 할 곳이 보일 것입니다.”

바람의 방향을 내가 임의로 바꿀 수 없습니다. 가장 자유하는 사람은 그 바람 위에 타는 사람입니다. 내가 임의로 바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바람을 거부하여 잠재울 수도 없습니다. 그 바람에 자신을 맡기고 그 바람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때로 바람은 우리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곳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이고 순종의 사람입니다.

신천옹이라는 새가 있습니다. 알바스트로라는 새입니다. 제대로 걷지 못해서 뒤뚱거리는 우스꽝스러운 새입니다. 그래서 바보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천옹은 어제처럼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아무도 집에서 나오지 않는 날에 절벽에 서 있다가 바람이 가장 강력할 때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날개짓을 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펴고 바람을 타기 시작합니다. 무려6일동안 날개짓도 없이 하늘을 비행합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 가장 높이 올라갑니다. 그것은 신천옹이 바람을 이해하고 있고 그 움직임을 알고 그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믿으십니까? 성령은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바람을 타면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더 넓은 곳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바람을 손으로 잡아 소유하려고 한다면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고백한 것처럼 그 노력은 허무의 고백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육체에 머물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늘을 믿고 순종하여 성령의 바람을 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