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1月10日 主日礼拝
「흐르는 강물 속으로」
여호수아3:5‐17
설교 조용길 목사

저는 저녁에 토요스에서 하루미를 지나서 츠키시마를 돌아오는 코스로 자주 산책을 합니다. 걷다 보면 타워맨션들 사이로 운하가 펼쳐진 야경이 아주 근사합니다. 그런데 바다 위에 떠 있는 유리상자같은 건물들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시편 139편의 말씀이 자주 떠오릅니다.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39: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우리는 바다 끝에 살고 있고 바다 사이를 늘 건너 다닙니다. 바다 끝에서 살고 있지만 시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피해서 숨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이 바다 끝에 교회가 있어서 우리가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주일아침에 바다를 건너와서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간 이야기가 있고 또 강을 건넜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것은 배를 타고 건넌 것도 아니고 다리를 놓아서 건넌 것도 아닙니다. 공동체가 믿음으로 물을 가르고 마른 땅을 걸어서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넜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믿음의 무용담도 아닙니다. 신학의 얼굴을 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이성적인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믿음 위에서 공부한 신학적 결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믿음없음을 변명하려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건너지 않으면 안되는 신앙의 과제가 곧 홍해이고 요단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요단강을 건너갔던 사건은 어떤 것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를 이해하려면 그 이전에 있는 구약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즉 모세오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세오경에서 여호수아까지 넓게 참고하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시죠. 창세기 후반부 37장 이후부터는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전체에서도 요셉의 이야기만한 극적인 이야기가 드물지요. 창세기도 요셉의 이야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인생의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동시에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과 가족은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만나 고통스러워 합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때에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왔습니다. 거기서 가족이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고 용서를 통해 회복이 일어나지요. 이스라엘은 요셉 덕분에 기근에서 살아 남아 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집트에 정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단강을 건너는 날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보면 470년 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의 보호 아래 난민생활을 시작하지만 요셉이 죽고나니 이스라엘에게는 정치적 보호가 없어졌기 때문에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애굽에서 430년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노예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노예근성이라는 것이 생겨버리면 거기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오랜 기간을 노예로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430년이 지난 뒤에 드디어 누가 등장합니까?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홍해를 건넙니다. 노예근성에 물든 백성들에게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고 모세가 등장하면서 출애굽기가 시작됩니다. 역사적으로 읽으면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개인적인 인물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와의 언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출애굽기는 공동체적 체험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공동체의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공동체, 그러나 아직 노예근성으로 찌들어 있던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율법을 주십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계시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법도와 명령은 레위기에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러면 레위기는 무슨 책입니까? 레위기는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드려야할 마땅한 바 하나님 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레위기에서 가르치는 예배행위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배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행위입니다. 아마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자답다는 생각은 해보셨겠지만 인간답다는 말은 처음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에게 있어서 예배가 가장 인간다운 행위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있습니다.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체험적으로 아는 일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드리지 않는 사람의 삶과 신앙의 자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고 예배조차도 법으로 강화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그것을 지키기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를 향하는 인간의 방향성입니다. 그러니 예배라는 것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기회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희망과 교훈보다는 더 지독한 좌절과 실망을 만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뒤에 레위기가 위치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들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결정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 입니다.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은 자신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믿음을 웅변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고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기적과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화가 날 지경입니다. 왜 그리 답답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종이로 되어 있지만 진지하게 읽다 보면 거울로 바뀝니다. 그래서 나를 비추어 줍니다.

그토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만한 것입니까? 손에 잡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물질입니다. 지금 당장의 풍요입니다.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예배를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인간화의 길입니다.나는 돈이 좋아서 돈을 섬긴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돈에다가 하나님이라는 이름표를 써서 부칩니다. 그래서 그 돈을 하나님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기도하러 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빌었던 것은 소가 좋아서 소에게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명명한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수순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도록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섬기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십계명에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귀한 사람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물질과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하신 피조물에게 빌고 절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리에서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그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훈련에 통과하지 못하고 광야를 방황해야 했습니다. 불신앙에는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불신앙 때문에 광야에서 모진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아프고 힘들고 배고프고 목마르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진노 중에도 자비를 잊지 않는 하나님은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만해지면 또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만 그것이 단순하게 남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 전에 절망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먼저 발견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을 인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십시오. 출애굽한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해서 갔습니다. 거리가 어느 정도 됩니까? 애굽에서 출발하면 가나안이라는 곳, 지금의 팔레스타인까지 직선거리로 640km정도이고 길을 따라가면 711km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까스르 엘 야후드(Qasr El Yahud) 라는 곳까지 구글로 검색해봤습니다. 자동차로 달릴 경우에는 8시간 51분이 걸리고 도보로 가더라도 145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차로는 하루면 갈 수 있고 하루에 10시간을 걸으면 2주 뒤에는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거리를 얼마만에 도착했습니까? 40년이 걸렸습니다. 4년 정도라면 게으르다고 좀 비난할 만하겠지만 40년이라는 말을 듣고 보면 통곡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좁은 시내반도에서 40년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40년이면 인간의 일생이지 않습니다. 40년에 세대가 바뀝니다. 그 시간들을 허비한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들은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모두가 다 죽을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살아남았던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갈라진 홍해를 걸어서 건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생이 끝날 때까지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 40년이라는 말을 듣고 보면 참으로 허무합니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누구입니까? 그 1세대가 다 광야에서 죽고 난 뒤 그 다음 세대가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어도 인간은 물질의 노예근성과 싸워서 이겨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민수기로 갑시다. 민수기에는 모세는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낸 이야기가 나옵니다. 12명을 보냈는데 돌아온 그 정탐꾼의 보고가 비관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상대라는 것입니다. 13: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렇게 보고를 하니까 40년을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 노예 생활할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는 고기를 먹고 시키는 일만 하면 됐습니다. 그것이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모세가 우리를 꼬드겨서 결국 고생만 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게 되었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40년전의 노예생활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발악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 중에 두 명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은 긍정적이었습니다. 민수기14장입니다. 14: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가나안이 아무리 크고 강성할 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와서 다르게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가 너무 강해서 자신들이 메뚜기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존재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것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문제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우리가 찬양하는 노래 가사 중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의 고백이 갈렙의 고백입니다.-여호수아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갈렙은 혼자 그곳을 개척하러 가지요.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이스라엘 전체의 리더가 됩니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글 신명기는 모세의 유서와 같은 글입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남기고 죽습니다. 그렇게 모세오경은 끝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사령관이 되어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는 것이 오늘 본문 여호수아서입니다.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임자가 유능한 사람이라면 후임자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전임자는 홍해를 가르고 40년을 인도한 모세입니다. 그러나 홍해를 가른 것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것과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 또한 여호수아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역사 뒤로 사라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마지막에 해야 하는 일은 여호수아의 고문이나 이스라엘의 원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남긴 신명기는 이미 주신 율법에 대한 재확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라는 원칙을 다시 제시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신명기의 히브리어 ‘데바림’이라는 말의 뜻이 제2율법, 또는 율법의 반복이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새로운 율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율법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주지시켰습니다. 저는 모세가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 가장 위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리더십 이양 이후에 스스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모세 밑에서는 여호수아가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의 시대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각각 다릅니다. 여호수아의 시대에 모세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었습니다.

장인의 양을 맡아 양치기를 하던 모세가 부름받은 것이 80세이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모세는 120세였지만 건강해서 눈이 흐려지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시체를 찾지 못하고 슬퍼하며 한달간 장례를 치루었다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대교체를 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렇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힘을 주시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과 배치될 때 거기서 다 멈추어 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그 납득하지 못하는 현실에 말씀을 신뢰하여서 한발을 내디딜 때 현실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을 마땅히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한발을 내딛지를 않고 포기해 버립니다. 사람들은 그 믿음을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단 한 명의 믿음으로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고, 그러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제는 현실 또는 합리로 받아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현실을 중요시하지만 그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믿음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현실 감각 없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현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알기 때문에 믿음은 현실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읽어보십시오. 가나안 정복전쟁이지만 가나안 원주민과의 전쟁은 거의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구와의 전쟁입니까? 자신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과 하나님이 구하시는 믿음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것이 서로 배치되어서 전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상황에게 지면 가나안에게 지는 것이고, 믿음이 현실을 이기면 가나안에게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병기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도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하시지만 요단강을 건너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으로 치면 4월과 5월의 중간 시기입니다. 중동지역은 이 시기에 가장 많은 비가 내립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 앞에 도착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강이 범람하는 우기였습니다. 강물이 넘치고 물길은 거세어집니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시기가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은 우연도 아니었고 때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를 정하신 것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는 시기,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이 인간의 믿음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온통 역설이고 역전입니다. 이 위기는 바꾸어 말하면 믿음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입니다.

위기가 있습니다. 없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위기 앞에 서서 믿음으로 반응하면 그것은 기회가 되어서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역전과 역설을 얼마나 즐기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엄격하고 어려운 상황들을 만날수록 우리는 더욱 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새로운 어려움이 임했다면 이전의 어려움은 이제 사라지는 것입니다. 중독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에 중독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물질의 노예근성을 버리려면 하나님께 구속되어야 합니다. 요단강이라는 위기는 광야생활이라는 위기를 종식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맞는 위기는 기회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매게 하고 물살이 강한 강으로 그냥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무서운 요단강을 아무런 대책없이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모세의 홍해 때에도 그랬습니다.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이제 요단강에 다다르면 제사장들은 그 세차게 흐르는 물속으로 언약궤를 맨 채로 직진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급류에 휩쓸려버릴 것 같지만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명령을 받았지만 지휘관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작전을 결단하고 지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지고 강으로 들어가는 순종을 해야 합니다. 상황은 믿음이 첫발을 내딛기 전에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시작되면 상황은 바뀝니다.

주목할 것은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서 그 뒤를 따라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니 뒤에 따라오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선 자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됩니다. 백성들에게 그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믿음으로 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 위험하지만 백성들은 뒤에서 따라오니 안전합니다. 다행입니까? 아닙니다. 안전하게 뒤따라오는 것이 다행이 아니고, 더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물을 갈라놓고 그 길 위로 건너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길을 갈라주시면 그 상황을 확인하고 가겠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면 그 믿음을 확인하시고 열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위험하고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상황에서만 확인됩니다. 제사장들은 급류에 발을 집어 넣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있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필사적으로 언약궤의 안전을 위해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겠지요.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급류의 위기 속으로 하나님 말씀과 인간의 순종이 운명공동체가 되어 함께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급류가 이기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믿음이 이기겠습니까? -3:15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3:16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물이 멈추었습니다. 믿음은 발을 요단강에 먼저 담구는 것이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이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위기가 있어야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집 옆으로 시내가 흘렀습니다. 그 물가에서 닭도 키우고 오리도 같이 키웠습니다. 닭과 오리는 육안으로 금방 분간이 되지만 오리새끼와 병아리는 잘 분간이 안됩니다. 저 뿐 아니라 어미 닭과 어미 오리도 그것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리새끼들이 졸졸 어미오리를 따라서 줄지어서 물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것을 보고 있던 닭이 자기 병아리 새끼가 물에 들어가는 줄로 알고 화들짝 놀란 겁니다. 날지도 못하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자기 새끼가 물에 빠져 죽는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모릅니다.그런데 물에 들어가고 나니까 유유히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닙니까? 병아리가 아니고 오리 새끼들이었습니다. 닭이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믿음 없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물에 들어간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면서 꼭 그 닭처럼 무안해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면 수위를 낮추거나 다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먼저 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하고 교량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산을 생각하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미 건너가게 하실 것을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뒤에서 안전하게 따라오고 언약궤 말씀을 들고가는 리더는 위험부담을 가지고 책임을 져야합니다. 앞에 서고 뒤에 서는 것은 각각의 믿음의 분량대로 주신 은사대로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은 공동체가 다 함께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선 자들은 희생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뒤따라오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헌신합니다. 지도자는 그래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공동체를 위한 모세의 헌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리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희생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헌신한 사람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뜻이 역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2019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공동체도 이동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필요가 소명입니다. 한해가 끝나기 전에 우리 공동체가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근심 걱정은 무용합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험할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일어서십시오. 도전에 응전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는 발전합니다. 발을 요단강 안에 들여 놓을 믿음을 가진 분들은 언약궤를 메고 일어나십시오.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선교를 기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헌신과 간증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