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8月18日 主日礼拝
「신앙의 소망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28:16-20
바울은 몰타섬에서 3개월을 체재하면서 안식과 위로를 경험하고, 보디올(プテオリ)까지 마중나온 로마의 형제들을 만나 믿음의 교제합니다. 거기서 바울 본인이 위로와 용기를 받고 로마에 들어갑니다. 사도행전도 마지막에 다달았는데 사도행전의 선교에는 땀도 있고, 눈물도, 고통도 있고, 그로 인한 절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동역자의 위로와 하나님의 회복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에는 사람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이 드러나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선교의 능력’이 아닌 ‘믿음의 순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바울이 형제들과 교제한 후에 용기를 얻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슨 용기입니까? 그 용기는 순종하기 위한 용기일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 용기를 얻기 위해 모인 형제들과의 교제하면서 오히려 바울이 위로와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들이 바울에게 용기를 주기위해 격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의 교제가 신앙의 힘을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용기 있는 사람이 용기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서로 만나면 그 믿음과 믿음 사이에 용기가 생깁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만남을 주선하시고 그 만남을 통해서 믿음을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선교를 진전시키십니다. 신앙생활도 선교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 동료와의 관계에서 성립합니다. 만약 이 관계가 부재하다면 그 신앙은 실재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습관이거나 관념일 것입니다. 신앙은 관계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확인해봅시다. 우리는 믿음의 교제를 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교제가 없으면 믿음은 곧 작아지고 시들어갑니다. 아마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고립되어서 혼자 있으면 신앙은 용기와 자신을 잃어갑니다. 신앙생활에서 성도의 교제를 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생각해보면 믿음이 처음 시작될 때도 믿음의 교제라는 것을 통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주일예배 후에 잠시 한 시간 정도의 식사 교제에서 겨우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영적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와 신앙의 교제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채워가는 것인 동시에 누군가의 믿음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 각자의 신앙의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없다면 자신의 신앙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민이라도 누군가가 이미 고민하지 않은 주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적 고민을 공동체의 교제 안에서 공유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반드시 선하게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민을 자신만의 특수한 문제로 여기고 독단적인 결론을 내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의 길에서 늘 도사리고 있는 교만이라는 함정입니다. 믿음의 교제는 마치 모닥불에 장작 둥치를 들어올려주어 바람이 통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씨는 남아있는데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 꺼져가고 있을 때 들어올려 바람길을 내어주면 다시 불길을 일으킵니다. 자신의 언어로 믿음의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식사를 나누는 교제를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 믿음에 바람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기를 맞게 하는 결정적인 말씀은 누군가의 설교에서가 아니라 작은 테이블에서 인격 안에서 주고받던 말들입니다. 아무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교제가 끝나고 나면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믿음의 열정과 용기가 다시 일어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어서 꺼지지 않습니다. 다만 바람을 통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불길이 솟으면서 다시 회복됩니다. 일상을 함께 사는 성도들이 모여 일상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는 시간이 아니라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신앙을 위한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성도가 모이기를 힘쓰고 그 한 가운데 스마트폰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두십시오. 그 시간을 가져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건조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보디올에서 백부장의 특별한 배려로 형제들과 일주일간 믿음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미리 보낸 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어쩌면 로마서를 놓고 질문하고 대답하며 복음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에게서 로마서 강해를 직접 들어보면 그 느낌이 어떨까’ 바울을 둘러싼 그 일주일간의 교제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이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 때, 누군가는 모여든 형제들과 바울 일행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을 것이고, 또 차를 준비해서 먹고 마시면서 늦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성찬을 했을 것입니다. 그 교제가 주는 힘으로 바울은 로마로 가야할 사명을 다시 확인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형제들에게도 용기가 주어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워지는 네로에 의한 로마 대박해에 견딜 수 있는 신앙의 용기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서로의 믿음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신학교 졸업할 때 당시 대학원장이었던 교수님이 졸업생을 모아 놓고 아주 엄숙하게 성찬식을 했습니다. 졸업생들은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어 먹고 각자의 임지로 떠났습니다.
지중해의 폭풍에서 구원을 받고, 몰타섬에서 안식을 얻고, 보디올에서 성도의 교제를 경험한 바울은 이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감옥이 아닌 일반 가옥에서 생활하며 한 사람의 감시관에게만 감시받도록 조치되었습니다. 가택에서 출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공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총독과 백부장의 보고서가 받아들여져서 로마 당국이 배려한 것 같습니다. 본문은 짧게 기술하고 있지만 이 가택연금기간은 2년으로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방문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개척 베이스 캠프가 만들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오늘 예배의 시작에 스가랴서를 읽었습니다만,-9: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갇혀있으나 소망을 품은(望みを持つ捕われ人) 바울이 로마라는 요새에 들어와 있습니다. 가택 연금 생활이 시작되자 마자 바울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청했다고 했습니다. 로마로 이주하여서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가 된 사람들이겠지요. 유대인 공동체의 유력자라는 것은 로마 사회와 연결고리를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테러를 당하고 고소당한 일, 오랜 기간 가이사랴에서의 감금과 유대인에 의한 살해위협 등 유대사회와 총독부의 화제가 된 것은 분명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 덕분에 선교사로서의 바울의 입지는 넓어졌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바울이라는 인물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온 바울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라는 선교사의 존재감이 그들을 바울의 로마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오게 한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니 복음의 길이 더 크게 열렸습니다. 물론 상황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길이 열립니다. 결국 길을 열어가는 것은 복음을 위한 용기있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은 믿음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선교 패턴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을 먼저 접촉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흩어져서 살아야 했던 역사적 이유는 역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계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초기지가 되는 것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원의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었고 하나님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우선적으로 그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잠시 신명기로 가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합니다.-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이후 내용은 안읽겠습니다. 꼭 읽어보시고 축복의 근원을 소유하십시오. 그런데 28장은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15절에 와서는 반대로 그 축복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가 이어집니다.-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그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에서 신명기의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25절에-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물론 이 저주와 경고의 말씀은 ‘순종하지 아니하여…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역사적 사실로써 이스라엘은 불순종하여 그 축복의 기회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파괴되고 파편이 되어 민족은 분산되었습니다. 이 ‘파괴를 통한 분산’이 그리스어로 ‘디아스포라’ (διασπορά)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데 그 원 뜻이 ‘흩뿌리는’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복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에 의한 징계와 고난을 받아 파괴되고 흩어진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다시 그들을 일으켜 복음의 거점으로, 일꾼으로 사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입니다. 흩어져서 안디옥에 갔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바울을 파송했고, 흩어진 사람들이 로마에 살고 있었고, 에베소에 살고 있었고, 고린도에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사회에 교회를 세워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1800만의 유대인이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740만명이 해외에 나가 있습니다. 일본인도 130만명이 나가 있습니다. 일본보다 훨씬 작은 한국은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나가 있는 것입니까? 한국에는 지난 100년간 식민지배의 역사가 있었고 민족간 전쟁의 역사가 있었고 오랜 시간 군사독재가 있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하루 세끼를 먹고 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늘 가난했습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많은 것은 그 역사 안에서 삶의 현장이 파괴되어 흩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가 많습니다.
콜로라도 주립대의 사회과학인 교수인 윌리엄 사프란(William Safran)이라는 학자는 디아스포라를 설명할 때 그것을 이민 공동체와 구별했습니다. 해외로 이주했다고 해서 다 디아스포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본향에서부터 흩어져 나온 사람들이고, 둘째, 그 본향에 대한 역사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셋째,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고, 넷째, 언젠가는 자신들의 본향으로 되돌아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다섯째, 본향의 안녕과 회복을 위해 현재도 노력하고 있고, 여섯째로 본향과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체 의식과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사람입니다. 사프란은 이런 사람을 디아스포라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분명히 사프란이 정의한 디아스포라입니다. 유대를 버리지 않고 언젠가 유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유대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가진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로마의 언어와 문화와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고 로마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로마선교에 기초공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도 지금까지 전세계에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이 기초공사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흩으셨지만 흩어진 사람들에게는 복음과 선교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디아스포라가 복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나면 돌아가야 할 본향이 바뀝니다. 정체성을 국가와 민족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왜 유대로 돌아가려고 했습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에만 예배가 있고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의 예배와 소망의 주소를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어도 예배할 수 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11: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바울도 유대인들도 다 유대를 떠나 있었지만 생각하는 본향은 다릅니다. 바울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유력자들을 초대해서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동족을 거스르거나 유대의 관습을 적대한 일이 없다는 오해를 풀었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의 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바울을 체제를 전복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지만 바울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오실 메시아로 전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미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 이 심정을 썼지 않습니까?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보다는 이야기가 더 잘 전달되는 편이었습니다. 유대에 있던 유대인들의 모습은 선동되고 세뇌되어 편협적이고 폭력적이었습니다. 거짓과 선동에 핏대를 올리는 무지한 예루살렘의 군중들을 읽어왔지 않습니까.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고 전도자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구별하지도 못하고 악을 들어 선을 때려죽이며 그것을 믿을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종교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속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세상에 그토록 간단하게 속는다면, 거짓 믿음에도 속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격과 신앙의 존엄이 달린 문제입니다. -28: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유대인들 앞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참 무거운 무게감을 가진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과 유대인들이 가진 공통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위해 지금 바울 자신은 묶인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과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공유하는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의 약속의 성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바울은 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그 소망이 성취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바울을 신성모독과 이단자로 죽이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된 복음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언젠가 올 축복과 구원을 여전히 기다리십니까? 저는 바울이 말하는 소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바울과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사용한 것은 히브리어로 욥기이고 헬라어로는 바울서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난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제일 많이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소망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에 대한 소망입니까? 조금 더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려는 소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소망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을 때까지 가난했고 주위를 돌아보면 믿음의 사람들도 병들고 약해지고 죽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망이고 무엇이 구원입니까? 죽어서 천국가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왜 그곳을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 신앙과 유대교 신앙 그리고 이슬람 신앙은 사실 대부분을 공유합니다. 발생지역이 같고 아브라함을 조상하는 하는 유일신교이고 유대교의 토라에서나 이슬람의 꾸란에서나 다 창세기의 창조신을 믿습니다. 구약이라는 경전을 공유하고 선지자와 천사와 사후세계를 믿습니다. 그리고 심판과 부활의 교리를 믿으며 선지자로서 예수까지 인정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지금 바울이 말하는 소망의 이유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무엇이 없습니까? 대속이 없습니다. 속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대속이 필요합니까? 십자가는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천국이 소망이라면 성경에 천국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천국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묘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대속으로 인한 죄사함을 이해하고 십자가를 믿었으면 천국은 설명할 수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바울의 소망은 그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는 세상, 즉 천국을 소망합니다. 나 대신 신이 죄값을 치루어 피흘려 죽고 나를 구원해 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타종교를 끌어내리고 기독교의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한 소망 말고 다른 곳에 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많이 위로하십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있는 그 소망을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고 그 소망이 있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예수의 피를 죄사함의 복음으로 믿으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이 없다면 영생은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죄사함이 없다면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생의 행복이 어찌 기쁨이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죄사함을 믿으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어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 소망의 질서를 정리하십시오. 그것보다 더 큰 소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의 소망을 위해 복음과 삶을 나누는 작은 모임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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