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0장 13~22
10: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10: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 하시나이다
10: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10: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랑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0: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 치는 것 같으니이다
10: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0:19 있어도 없던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
10: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시되
10: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10:22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인도의 한 청년이 자신을 낳았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한 사실이 있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은 고통스럽고 그 삶이 시작된 것은 자신의 동의를 얻지 않고 출산한 부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지만 그 청년은 철학이며 사회 운동인 반출생주의(anti-natalism)에 기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출생주의란 말 그대로 출생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철학입니다. 사는 것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죽으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즉음도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반출생주의는 고통의 문제입니다. 고통받는 인간의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철학입니다. 저출산 현상도 출산과 육아가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욥은 너무 아파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고통이기에 욥은 반출생주의자처럼 자신의 출생을 저주합니다. 3장에서도 욥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7장에서는 다시 사는 것에 대한 소망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삶을 회의하고 다시 죽기를 바랍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졸도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이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철학을 만듭니다. 쇼펜하우어가 반출생주의자인 것은 어릴 때 부모에게 학대라는 고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목에까지 차오르면 그것을 견디지 못해 삶을 저주하지만 잠시 숨 쉴만한 여유가 생기면 다시 삶의 소망을 가집니다.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힘내라는 말에는 힘이 없습니다. 진통제 한 알이 들어가 고통을 덜어주고 나면 다시 살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조금만 도와주시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음악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gK03Q4ftX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