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年1月26日
여호수아 5:10-12
「전환의 시대」
조용길 목사
지난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전투를 준비해야할 시기에 적진 앞에서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앞으로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온전하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한 명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 결정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당연히 필요할 것이지만 그것과 함께 합리적 전략이 병행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외없이 우리의 전략과 무장을 해제하고 오직 믿음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에 통과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확인되면 그때부터 이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합당한 힘이 주어집니다.
믿음은 그저 믿는다고 말하고 내팽개치는 무책임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힘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을 빼는 것 만큼 힘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을 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어제가 설날이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길갈에 도착한 것은 정월 10일이었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4일 후인 정월 14일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킵니다. 40년만에 유월절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본문은 이 유월절을 다루고 있지만 유월절보다 유월절을 기점으로 일어나 또 다른 사건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5:11 過越のいけにえをささげた翌日、彼らはその地の産物、「種を入れないパン」と、炒り麦を食べた。その日のうちであった。
5: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낸 그 다음 날에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었던 것을 말합니다. 유월절도 40년만이지만 광야 음식이 아닌 곡식을 조리하여 먹은 것도 40년만이거나 오랜만의 일일 것입니다.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는데 무교병이라는 것은 누룩을 넣지 않아서 발효하지 않아서 부풀지 않기 때문에 마치 구운 전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가나안에서 난 또 다른 다른 곡식을 볶아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광야생활에서는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을 테니 그들에게는 별미였을 것입니다.
길갈이라는 곳은 참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길갈이라는 것은 곧 요단강 도하의 결과가 아닙니까? 여기에 역사적 터닝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은 역사 안에서 중요한 전환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 시대의 전환은 오늘 본문의 일련의 사건으로 시작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고 난 뒤에 가나안의 소산을 먹은 것이고 그 다음 날 아침부터 만나가 그친 사건입니다.
백성들이 아침에 나와보니 매일 내리던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빈손으로 장막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또 그 다음날에 나가보아도 만나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나가 무엇이었습니까? 만나를 말하려면 출애굽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는 놀라온 기적을 경험하고 출애굽에 성공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은 40년을 광야에서 돌아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곧 가나안에 도착할 줄 알고 열심히 두 달 반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도착했는데 그때 이미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양식은 다 떨어졌습니다. 돈 떨어지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의 어느 조사에서도 공통적으로 단연 1위는 경제적 문제입니다. 그 경제적 문제도 세분화해보면 생활비의 부족과 결핍이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시대는 달라도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경제의 결핍 또는 그런 결핍이 올 것이라는 불안이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합니다.
백성들은 애굽에서는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잘 먹고 잘 지냈었는데 광야로 나와서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다고 불안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좀 과장일 겁니다. 애굽에서는 과연 노예들이 고기 가마 옆에서 고기를 뷔페로 먹었을까요? 주인의 고기를 구우면서 들키지 않게 몰래 몰래 먹었겠지요. 왕년이라는 것은 항상 과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때는 자신이 비참해서 차라리 광야에 나가서 풀 뜯어 먹고 사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하겠다 생각하고 모세를 따라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나와서 경제가 힘들어지니까 밥은 먹여주던 노예생활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 밑에서 일하자니 치사하고 거기서 나와보면 다른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양이 다르지 않는가 봅니다.
이 걱정과 불안이 분노가 되고 원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경제가 안 좋아지면 누구를 원망합니까?
정부 아닙니까? 정치인입니다. 리더에게 그 책임을 묻고 원망합니다. 먹을 것으로 불안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모세라고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분노하고 원망하기 전에 홍해를 건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방향감각이 없으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적의 홍해를 건너고보니 그곳은 광야의 입구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광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틀림없습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길을 가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먹일 것이 분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호하시면서 백성들에게 비상식량을 내 주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16장입니다.
16:4 主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パンが天から降るようにする。民は外に出て、毎日、一日分を集め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彼らがわたしのおしえに従って歩むかどうかを、試みるためである。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과연 다음 날 아침에 장막에서 나가보니 작고 둥근 흰 서리같은 것이 땅에 내렸는데 먹어보니 맛이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보고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의 뜻이 이게 웬 떡이야 라는 의미입니다. 만나는 새벽에 어김없이 내렸고 해가 뜰 때까지 거두지 않은 것은 자연에서 사라졌습니다. 먹을 수 있는 양이 한 되 정도로 한정되어 있어서 욕심을 낼 수도 없었습니다. 너무 많이 거두어 가도 다 먹을 수 없었고 비축해두면 다음 날에는 금방 상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는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해본 적도 없고 사냥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은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였습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이 양식이 공급된다는 것을 눈으로 보며 자랐습니다. 다음 끼니에 대한 걱정은 그들에게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직후, 신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공급하기 시작해서 광야 40년의 생활 동안 이 만나의 공급은 중단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을 주식으로 삼고 먹던 만나가 그쳤으니 백성들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마치 일본인이 우메보시와 미소시루를 그리워하고 한국인이 된장찌개와 김치를 그리워하듯 만나의 맛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만나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자립하라는 것일까요? 만나라는 음식과 헤어져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만나의 중단의 의미가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자립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립할 힘이 어디 있습니까? 만나는 중단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더 커집니다. 다만 그 은혜의 형태와 공급방식이 달라질 뿐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농경을 시작할 수 있게 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 주시는 은혜가 다릅니다. 만나가 끝난 사건은 공동체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전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은혜의 형태를 다르게 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때에 따라 변화를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 안에서만 안주하려고 하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계속 살기를 원했다면 그 두려운 변화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고 출애굽의 역사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출애굽이라는 변화는 잘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민족이 대이동을 해야 하는 변화였습니다.
변화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변화는 늘 두려운 것입니다.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은 밤중에 신을 신은 채 손에는 지팡이를 잡은 채 급하게 양을 잡아서 그것을 먹고 그 길로 서둘러 애굽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변화는 그렇게 예기치 않게 준비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변화에 충격을 완화시키는 일은 할 수 있는 대로 하는 것이 좋겠지만 충격이 있다고 해서 변화를 무서워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홍해를 건너듯이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변화의 시기로 돌입한 것입니다. 애굽 시대에서 광야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광야 시대가 끝나고 가나안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삶의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아야 합니다. 만나에 연연할 수 없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면 먹을 것은 만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테니까요.
그것은 욕심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하나님은 더 풍성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의 비전은 만나의 지속이 아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땅에 들어가게 되면 만나의 은혜는 시대를 마치고 끝나야 합니다. 그것을 기대라고 해야 할 지 우려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실제가 된 것입니다. 여전히 걱정이 많지만 비전은 분명히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상황은 하나님이 바꾸어 가십니다. 백성들은 그것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것입니다. 그저 매일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살던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익숙했던 것이 끊어질 때 우리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변화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은 비극적 인간조건을 초월하기 위한 유일한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시대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만나가 끝나는 절망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이전 것은 종료되어야 합니다.
은사는 여기서 새롭게 주어지고 공동체를 더욱 힘있게 합니다. 곤란에 직면하지만 그것에 도전할 때 은혜는 배가하여 주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재정이 어려운 교회입니다. 적은 성도가 최선의 헌금으로 섬겨온 교회이지만 항상 교회가 넉넉하게 자립하기에는 힘들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교회를 위해 헌금하고 헌신해 오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넉넉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넉넉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원래 넉넉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때 주시는 것으로 한발 한발 나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을 비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끼려고 하지 말고 쓰려고 해야 합니다. 쓰임이 많은 교회는 많이 주실 것이고 많이 받은 교회는 예배와 선교를 위해 많이 쓰면 됩니다.
우리는 2년전에 모교회의 아다치 사랑의 교회로부터 개척 때부터 28년간 받고 있던 지원금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충분했기 때문에 지원을 끊는 것이 아니고 자립할 것을 결심하고 끊었습니다. 재정은 충분하지 않지만 나이가 28살이니 그런 결심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작년에는 그 세 배의 금액에 해당하는 교단지원금도 자발적으로 끊었습니다. 지원기간이 끝나서 지원이 종료되는 경우는 있어도 자발적으로 지원을 끊어 달라고 연락한 교회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수입에 마이너스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보다 더 어려운 어떤 교회의 수입은 늘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원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이미 지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그 중에서도 젊은 세대가 모이는 신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영세함의 이유로 지원받는 것은 이제 끝내려고 합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지원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공급을 끊고 인간의 힘으로 자립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더 많이 주셔야 합니다. 미자립 교회를 위한 지원금이 아닌 다른 형태의 공급으로 하나님의 축복은 이곳에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지원을 받아 유지하기를 목표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예배를 확장하는 교회가 되고 선교를 넓혀 가는 교회가 되면 더 많은 재정이 들어올 것입니다.
광야로 나가는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듯 만나를 내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신명기에서는 무엇을 내린다고 하셨습니까? 앞으로 주실 축복이 토지의 소산이 많아지는 축복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28:12 主は、その恵みの倉、天を開き、時にかなって雨をあなたの地に与え、あなたのすべての手のわざを祝福される。それであなたは多くの国々に貸すであろうが、借りることはない。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하늘을 열어 더 많은 만나를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보고를 열어 땅에 보물이 맺히는 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는 만나와 비교할 수 없는 축복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나를 먹을 때 보다 더 많은 은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심어야 하고 언제 물을 주어야 하는지 농경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땀 흘려 경작을 해야 하는 성실도 필요합니다. 협력도 필요하고 분배의 지혜도 필요합니다. 신명기에서 약속했습니다.
11:10 なぜなら、あなたが、はいって行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地は、あなたがたが出て来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ではないからである。あそこでは、野菜畑のように、自分で種を蒔き、自分の力で水をや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1: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11 しかし、あなたがたが、渡って行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地は、山と谷の地であり、天の雨で潤っている。
11: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12 そこはあなたの神、主が求められる地で、年の初めから年の終わりまで、あなたの神、主が、絶えずその上に目を留めておられる地である。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나일강은 자연적으로 제방이 형성되어 있었고 제방 너머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저지대가 있는 천혜의 지역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는 표현되어 있지만 제일 중요한 물이 흐른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물이 있어야 그것이 젖이 되고 꿀이 될 것입니다. 가나안은 빗물로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우기에 충분한 비가 내려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만나보다 좋은 것입니다. 만나를 내리듯이 비를 내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젖보다 꿀보다 만나보다 중요한 것이 비입니다.
나일강 보다 좋은 것입니다. 이집트의 나일강에는 관개농업이 있었지만 그래도 물을 끌여들여야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물을 끌어올 필요없이 필요할 때마나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환경과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비를 약속하실 때 함께 하신 약속을 우리는 읽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11:13 もし、私が、きょう、あなたがたに命じる命令に、あなたがたがよく聞き従って、あなたがたの神、主を愛し、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て仕えるなら、
11: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1:14 「わたしは季節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の地に雨、先の雨と後の雨を与えよう。あなたは、あなたの穀物と新しいぶどう酒と油を集めよう。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1:15 また、わたしは、あなたの家畜のため野に草を与えよう。あなたは食べて満ち足りよう。」
11: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1:16 気をつけなさい。あなたがたの心が迷い、横道にそれて、ほかの神々に仕え、それを拝むことのないように。
11: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 절하므로
11:17 主の怒りがあなたがた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主が天を閉ざされないように。そうなると、雨は降らず、地はその産物を出さず、あなたがたは、主が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その良い地から、すぐに滅び去ってしまおう。
11: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사실 백성들은 맨날 만나만 먹었으니 그것을 지겨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나가 아닌 비를 내리신 것은 더 맛있는 것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게 되는 은혜가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기억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그 좋은 것들을 받아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서 망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까? 맞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풍성하게 주시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만나의 정신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만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감사하게 먹는 것입니다. 풍성함의 원칙은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고를 기억합시다.
8:12 あなたが食べて満ち足り、りっぱな家を建てて住み、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8:13 あなたの牛や羊の群れがふえ、金銀が増し、あなたの所有物がみな増し加わり、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8:14 あなたの心が高ぶり、あなたの神、主を忘れる、そういうことがないように。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제 만나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만나의 정신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의 시대도 만나에서 비내리는 시대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지금 하시는 일을 알아 순종하고 그리고 앞으로 하실 일을 기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