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8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의 시작은 창세기의 시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모든 것의 원천적인 기원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 세상의 시작을 낳은 것이 바로 「말씀(로고스, λόγος)」이었고, 요한복음은 그 로고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4절 사이에 「그」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칭대명사 「그」는 누구입니까? 즉 2절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 3절에서 만물을 지으신 분, 4절에서 생명이고 빛이라고 한 인칭대명사 「그」는 누구입니까? 문맥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칭대명사 「그」는 「말씀(로고스, λόγος)」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세상을 지었고,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라고 하니 말씀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에게도 언어가 있으므로 나의 언어를 통해서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지켜야 하는 강령을 적은 율법이 아닙니다. 종교의 경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이시니 언어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언어 체계로 자신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계시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대다수가 이것을 포기하고 오직 목사의 설교에 의존하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언어가 교제하는 것이야말로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사고를 정리합니다. 자기 안에 언어가 적으면 생각도 적습니다. 생각도 말로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한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적으면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적습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정체성, 존재 방식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실제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글을 읽지 않고, 지적으로 대화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끄집어내지도 않으면서 오직 이미지로 정보를 소비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멈출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생명이고 빛이신 존재가 곧 말씀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문맥상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문맥은 계속 이어져 갑니다. 7절과 8절의 「그」는 세례 요한이고, 10절 이후부터 나오는 인칭대명사 「그」는 비로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말씀이 성육신한 것, 지난주에 우리가 축하한 크리스마스입니다.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에서는 빛과 생명을 만드시는 창조의 서사에 놀라게 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놀라게 됩니다. 새해 아침에 나는 판타 키리스토(그리스도가 모든 것, πάντα Χριστῷ)라고 다시 한번 고백하고 한 해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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