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노병사(生老病死)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생의 사이클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희노애락(喜怒哀楽)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근사한 철학적 말 같지만, 삶에서 경험하는 실제적인 것은 고상하지만은 않다. 노여움의 각론에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짜증과 삐짐, 질투와 미움과 같은 훨씬 실제적이고 치사한 것이 들어 있다. 감정이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혹시 원수는 용서할지라도 주는 것 없이 미운 것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일단 누군가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감형 없는 사형 선고와 마찬가지다. 하나가 죽어야만 끝난다.
믿음은 생노병사와 희노애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수많은 감정에 붙들려 살아야 한다. 그러니 믿음이 있어도 짜증과 삐짐과 질투와 미움은 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말은 무식해서 하는 말이다. 교회가 덩어리로 존재한다면 거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교회는 수많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것이므로 짜증과 삐짐과 질투와 미움은 항상 교회 안에 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짜증 낼 것이고, 삐질 것이고, 미워할 것이고, 자기편을 만들어 가며 험담할 것이다. 인간은 짜증과 삐짐과 미움으로 실존을 증명한다.
어제 수요독서회에 주어진 주제는 사랑이었다.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어색한 주제…인간이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지식인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도 없는 사랑이라는 말은 조금 옆에 놓아두어도 된다. 조금 덜 삐지고 조금 덜 미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그마저 자신이 없으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도 된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다가 코로나 때 써 붙인 거리 두기 안내 글을 보았다. 철 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곧 철 지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코로나는 지났을지라도 여전히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찍어두었다. 상대를 위해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디서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