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36-46
사순절 기간입니다. 어떤 종교적 의무나 책임으로서가 아니라 신앙의 유익과 영적인 호흡을 위해서 고요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 입구 중앙에 겟세마네라는 작은 동산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던 날 밤이 깊어지자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이 때가지만 해도 예루살렘의 예수님 인식은 아주 좋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놀라워하며 좋아했고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이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대감에 넘쳐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 퍼레이드를 하셨지요.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님은 머무실 처소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4:12에 보면 제자들은 머무를 처소가 없어서 유월절을 맞았을 때 유월절 음식을 어디에 준비할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은 묵을 곳이 없다는 제자들의 불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좋고 예수님에게 걸고 있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기대감도 좋았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군중심리와 인격과의 차이입니다. 호산나라고 외쳤지만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군중심리에 의한 것이었을 지 모릅니다. 그랬으니 사람들은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겠지요. 신앙에서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도 좋고, 아플 때 고쳐주는 것도 좋고, 힘들 때 위로받는 것은 좋았지만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집회에서 은혜받는 것은 좋고,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좋지만, 자기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은 싫어하는 우리와 다른 것이겠습니까? 자신의 생활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보고 계셔도 괜찮습니까? 예수님은 좋은 분이지만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은 부담스럽고 내 방에서 함께 머무는 것은 불편한 것이지요. 조금 떨어져 있으면 좋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면 되니까요. 그런 우리 자신을 발견하면서 언제쯤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원래 늘 믿음직하고 무엇이든지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겟세마네에서는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감정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26:37 … 고민하고 슬퍼하사- 기도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감정은 불안과 슬픔이었습니다. 낯섭니다. 예수님도 슬퍼하고 불안해 하고 무서워하십니까? 예! 예수님은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기도를 권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 때문에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고 함께 있어 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겟세마네에서 고통받고 두려워하고 있는 예수,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만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인간이 어떤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고통이 아니고 죽어가는 고통입니다. 짧고 쉽게 죽이지 않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체내의 피를 다 쏟아내고 완전하게 말려서 죽이는 극형입니다. 살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 고통을 이겨 낼 방법도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지옥 그 자체입니다. 어떤 인간이 그 고통을 눈 앞에 두고 제정신으로 침착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의 아버지는 제가 종교의 길로 간 것을 생전에 늘 못마땅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적극적이고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날에 손녀와 손자가 할아버지 교회에 같이 가요 라고 아양을 떨어보아도 교회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단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아버지는 폐암을 앓다가 뼈에 전이되어 작년 봄에 돌아가셨습니다. 뼈에 전이된 후로 극심한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몰핀을 맞아도 고통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가족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는 빨리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통 당하지 말고 빨리 가시라고 어머니가 옆에서 울면서 말했지만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고 고통은 이어졌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그런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고통을 만나고 나면 도대체 인간들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고통이 덮쳐올 때 인간은 너무나 무력합니다.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고통을 견디어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임종 몇 시간 전에 잠시 고통이 사라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고통이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는데 그것은 “이 방에 예수님이 와 계신다” 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도 못 믿을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에 아버지의 시선은 저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초점이 분명히 돌아와 저의 눈과 마주치고나서 임종했습니다. 저의 눈과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간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간증의 눈빛이 이제는 저의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해줍니다. “이 방에 예수님이 와 계신다” 아버지가 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고통의 시간에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것은 분명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님이었을 겁니다. 모르핀을 먹어도 견디지 못하는 그 고통을 누가 알겠습니까? 가족인들 한 점이라도 고통을 대신 져 줄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아니면 누가 그 고통에게 말을 걸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님이 나타나 주셨다면 아버지는 분명 그 분을 따라가셨을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고통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화려한 수식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마음이 은혜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그 공포를 말하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전능하신 분이니까, 영웅이고 성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십자가에 대한 부담은 좀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슬퍼하던 한 명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워하던 눈빛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의 고통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을 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26:39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누가복음에는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땀방울이 핏방울이 맺히는 것처럼 기도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의 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입니다. 그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갔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8장 18절에는 그 날이 추워서 숯불을 피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닥불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공포의 밤에 베드로의 부인과 저주의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그날은 날씨도 춥고 마음도 추웠습니다. 때는 유월절 기간입니다. 예루살렘의 유월절 기간은 우리의 꽃샘추위처럼 밤공기가 찹니다. 밤공기가 찬 산기슭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맺히는 것처럼 기도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힘을 주어 기도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어찌하겠습니까?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예수님은 두 번째 기도를 하십니다.-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같은 기도입니까? 기도는 좀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두번째 기도는 -26: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가능하면 면제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하겠습니다”로 바뀝니다. 인간 예수의 두려움으로 시작한 기도는 고통스럽게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다시 인식하는 기도로 바뀌어져 갑니다. 기도는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저의 모든 기도가 응답되었다면 저는 분명히 후회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위해서만 기도하가다는 언젠가 기도는 멈추어 버릴 것입니다. 아니 신앙이 멈추어 버릴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응답해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뀌지 않으면 신앙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바뀌어져 가는 기도가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이내믹한 기도 생활이고 살아있는 신앙 생활입니다. 인격적인 기도란 하나님에게 묻고 또 기다리고 그것에 대답해 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의 뜻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된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하고 그것을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끝난 것이 아니고 그 기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그것을 따르겠다는 기도의 응답이 주어진 기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아래에 있는 동산입니다. 감람산은 올리브나무가 많아서 감람산이라 불렸지요. 올리브 산지에서는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냅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이 ‘기름을 짜는 곳’이란 뜻입니다. 당시에 올리브 기름를 짜는 방법은 맷돌로 올리브 열매를 으깬 다음 수분과 지꺼기를 분리하여 기름을 얻는답니다. 예수님의 몸과 마음은 올리브 기름를 짜내는 맷돌 안에 들어간 것처럼 부서지고 산산조각이 되어 그 틀 안에서 순수한 올리브유같은 기도가 추출되어가는 시간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그리고 두번째 기도를 마치시고도 오셔서 -26: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한가하게 빈둥거리는 잠은 아닙니다. 피곤하다의 원래 뜻은 ‘내리 누르다’ 라는 의미입니다. 피곤에 못 이겨 골아떨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한계였습니다. 아니 사람의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뿐이겠습니까. 조난당한 사람이 잠들어서 죽지 않습니까. 잠이란 것은 그렇습니다. 구원이 눈 앞에 와 있어도 피곤하면 잠들어버리는 것이 우리이지 않습니까? 사명이 눈 앞에 있어도 기도 앞으로는 나가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우리이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육체의 연약함을 잘 압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런데 곧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잡혀가십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 가운데 누가 앞장 서 있습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배신한 제자이지만 유다도 그날 저녁까지 같이 일했던 제자가 아닙니까? 유다는 안 피곤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를 배신하고는 것과 예수를 파는 것과 돈을 탐하는 것은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예수의 고난 앞에서 기도로 동참하는 것은 도무지 이겨내지 못할만큼 피곤한 것인데 돈과 죄가 유혹할 때 벌떡 일어나는 것은 무슨 힘입니까? 믿음과 선이 피곤해서 잠자는 동안 배신과 죄와 악은 믿음과 선보다 성실하게 일합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략한 은혜는 십자가의 은혜가 아닙니다. 하늘 보좌 예수님을 올려다보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무서워하고 있는 예수님의 눈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자신의 피부로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연약함에 주저앉아 있을 때 죄와 악의 세력은 왕성하게 일합니다. 남은 사순절의 시간 동안에 깨어있는 제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