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4月14日 説教
Ⅰヨハネ 4:10
「苦しみの中におられる主」
▶神の証しは愛です
愛が存在しないなら、神様も存在しません。愛があることこそ、神様がおられることの証拠です。だから、神様が存在しないなら、愛もないのです。神様の愛がないところ、それがまさに地獄です。愛の源は神様だからです。
▶愛が救います
救いとは何であり、天国とは何ですか?「罪から解放されることが救い」であり、「神の愛の中にいるのが天国」です。愛してみなければ、罪は分かりません。善を行ってみなければ、自分の悪には気付きません。愛は最善ではありません。愛は唯一なのです。 唯一人を救うことができるのは、愛だけです。エーリッヒフロムは『愛するということ』で、「利己的な人は他人を愛していないのではなく、自分自身を愛していないことである」と言いました。マタイ5章48節にあるイエスさまの「天の父が完全なように、完全でありなさい」という言葉は、愛の範囲を広げるということです。嫌なことを抱き始め、無関心だったことを愛し始めるのです。
▶痛みは愛の属性です
愛は幸せと喜びだけではありません。愛の中には痛みと苦しみもあります。痛みは愛の属性です。愛した人は、痛みに遭います。愛が大きければ大きいほど痛みも大きくなります。愛の富む神様はその愛のゆえにいったいどれ程の大きな痛みを受けたのでしょうか?「愛するということは傷づく危険に身を露出する行為である。何でも愛してみなさい。あなたの心は明らかに痛みを感じるものであり、もしかしたら壊れ落ちるかもしれない。」これはC.S.ルイスが『四つの愛』で愛と感情の関係を述べたものです。
▶愛のゆえに苦しまれました
イエス様が十字架で苦しみを受けたのは、罪のためというよりは、むしろ愛しているがゆえに、その荷を代わりに背負われたのです。大切なのは罪でもなく、痛みでもなく、愛なのです。自分が十字架を選択すれば救われ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私を愛し、苦しみを受け死なれたのがキリストの十字架です。それを知ることです。まず愛されたその愛を受け入れ、認めることです。私たちの救いの信仰は、私を愛し私のためにご自身をお捨てになった神の御子を信じる信仰です。その愛を守るために主はあまりにも過酷な苦しみを受けられました。
▶苦しみの中におられる主に従います
「十字架の神学」は、宗教改革のマルティン・ルターが唱えた神学です。中世のスコラ神学のいわゆる「栄光の神学」に対立して、苦しみの中におられる神様を思い越したのが、ルターの十字架の神学です。ルターは、中世の栄光の神を十字架に苦しむイエスに改革したわけであります。これに関して、ピリピ人への手紙では使徒パウロが涙を持って訴えます。「というのは、私はしばしばあなたがたに言って来たし、今も涙をもって言うのですが、多くの人々がキリストの十字架の敵として歩んでいるからです。」(ピリピ3:18)人々が十字架の敵として歩むということは、栄光の神に執着し、十字架で苦しんでいる神様を見捨てることであると、パウロは涙を流しました。ルターは「ただ十字架だけが私たちの神学である」と叫びました。パウロとルターは、苦しみを抱いている愛を無視したまま、宗教の栄光だけを追い求めることを十字架の敵としています。神様の愛は苦しみの中にあります。もし私たちが神を愛しているなら、私たちは確かに痛みを感じます。愛の属性には痛みがあるからです。だからでしょうか。私たちが痛んでいるとき、神様は最も近くにおられます。
▶痛みが終わると栄光があらわれます
今日から始まる一週間を苦難週と言います。そして来週にはイースターを迎えます。しかし、痛みを持って私を愛した神様を考えずに、栄光の復活の主に会う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痛みと苦しみのイエス・キリストに出会った聖徒は、来週、栄光の主の復活を見るのです。
2019年3月31日 설교
요한일서4:10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면 사랑 또한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이 곧 지옥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구원합니다.
구원은 무엇이고 천국은 무엇입니까?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사랑해보지 않으면 죄를 알지 못합니다. 선을 행하여 보지 않으면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랑은 최선이 아닙니다. 사랑은 유일한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5:48 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진다는 것은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기적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미운 것을 품기 시작하고 무관심하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노력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자신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사랑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행복과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 안에는 아픔과 고통도 있습니다. 고통은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한 사람은 고통받게 되어있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아픔은 더 커질 것입니다. 가장 사랑이 많은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까? C.S. 루이스는『네 가지 사랑』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여러분의 마음은 분명 아픔을 느낄 것이며, 어쩌면 부서져 버릴 지도 모른다.” 고 사랑의 고통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랑이 영원히 달콤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받았던 것은 죄를 위해서 고통받은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짐을 대신 진 것이고 그래서 고통받으신 것입니다. 핵심어는 죄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고 사랑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선택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셔서 고통받고 죽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믿음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고통은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죄의 양 때문이 아니고 죄인의 수 때문이 아니고 숨길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통받은 것입니다.
▶고통 속에 계신 주님을 따라갑니다.
「십자가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가 주장했던 신학입니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이른바 「영광의 신학」을 주장할 때, 그것에 반대하고 고통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말했던 것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루터는 중세의 영광의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예수로 개혁했습니다. 루터는 이것에 관해서 빌립보서의 사도바울을 눈물을 소개했습니다.-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이 눈물을 흘리고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에 집착하여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바울과 루터는 고통을 품고 있는 사랑을 외면한 채 종교적 영광만 추구하는 것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분명 아플 겁니다. 사랑의 속성에는 고통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고통이 지나면 영광이 올 것입니다.
오늘 주일예배를 시작해서 한 주간의 고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다음 주에는 부활절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안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영광 속에 부활한 주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복음서의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한 주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받았던 그 고통을 읽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통의 예수를 만난 성도는 다음 주 영광의 주의 부활을 함께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