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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부모에게 양육과 훈계를 받고 자랍니다. 부모는 자녀를 가르쳐야 할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에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가르칠만한 완전한 실력과 인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부모 고시를 치고 합격해서 부모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아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부모의 책임이 한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인격과 신앙의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모의 태도는 두려움과 겸손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생물보다 철저하게 자립할 수 없는 미숙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의 미숙함을 채워주고 끊임없는 실수와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용서합니다. 어린이가 미숙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잊어버린 어른의 양육 방식이 곧 학대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부모는 아이의 미숙함을 이해하고 오래 참고 용서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즉 사랑이 없으면 키울 수가 없습니다.우리는 실제 자녀에 대해서 많이 참고 많이 용서하고 많이 사랑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사랑하지만 사랑의 마음과 인격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어서 불완전한 인격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적으로도 완전하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기도 하고 아이를 오해해서 잘못이 없는데도 혼을 내는 일도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엄격한 훈육은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 아니고 부모의 분노의 감정의 폭발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이 교육인지 화풀이인지를 정확하게 압니다. 혹시 당시에 모른다고 하여도 성장한 뒤 과거를 생각해내고 그것이 부모의 엄격한 교육이었는지 부모의 인격적 문제 때문이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것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태어나서 세 살까지 귀여운 것만으로 그 아이가 해야 할 효도는 끝났다고.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부모의 돌봄이 있어서 성장했으니 그것은 아이가 부모에게 감사해야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그 동안 부모는 아기의 탄생과 그 존재로 인해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제 10년 정도 아이를 키워 봤을 뿐이지만 생각해보니 부끄러운 것이 참 많습니다. 아이의 미숙함을 항상 용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저의 미숙함을 더 많이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는 부모에게 화해의 말 한마디 없이 와서 품에 와서 안깁니다. 어린아이는 용서에 대단히 빠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미숙한 부모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도 부모의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많은 실수를 하고 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도 조건없이 자녀들에게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부모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드워즈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용서받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업는 것입니다. 우선 이것 하나 기억합시다. 부모는 아이이게 용서받고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번 주에는 고베의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가까이 교제하는 선교사 가정과 함께 가족 수양회를 하고 어제 돌아왔습니다. 좋은 안식과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소속한 단체의 이사 중에 심리학과 미술치료를 전공한 목사님이 한국에서 참석을 했습니다. 그분이 선교사 자녀들의 미술치료 시간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일정 내내 아이들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라도 찾아내서 위로해 주려는 모습, 그분에게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는 그분이 불과 몇 시간 만에 10년을 함께 살아온 저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 아이들을 파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가족과의 만남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보다 더 정확하게 아이의 심리와 그 원인까지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심리분석의 결과라는 것은 당연히 부정적인 내용을 포함합니다. 여러분이 부모인데 누군가가 여러분의 자녀에게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 정서가 불안하다고 말하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어떠시겠습니까? 게다가 그 원인을 자신이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좋아할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무지 중에 으뜸인 무지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것보다 더 지독한 무지는 자신의 자녀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원인의 제공이 되는 자신의 문제를 문제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모르면 고칠 방법은 완벽하게 없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성장에 따라 행복이 사라져가는 이유는 이 무지와 무능 때문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저희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결과를 저에게 말해 주셨습니다. 게다가 그 원인은 분명히 아빠일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정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나 때문인지 또 다른 환경 때문인지 낙서 같은 그림 한 두 장으로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들과의 나눔의 시간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 어떤 문제가 분명이 있고 그 원인이 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찾아가 일과가 끝나고 밤에 아내와 함께 찾아가겠으니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명이 밤늦게 까지 상담을 했습니다. 그분은 부모가 기분 나빠하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적으로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가정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치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책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그 원인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현실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 상담을 요청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잘한 겁니다. 우리가 잘한 것은 아이를 잘 키운 것이 아니고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한 것, 그것뿐입니다. 그 계단을 밟아야 희망이라는 계단이 나옵니다. 그러나 참 많은 사람이 그 계단을 못 넘어가더군요. 자기 자녀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을 못 견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인 체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에게 있어서 이미 자녀는 무엇입니까? 우상입니다. 하나님에게 양육을 위탁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자기를 위해 자기가 소유하고 우상인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그림을 곧잘 그려서 원장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특별대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어머니가 학원을 방문해서 상담을 한 적이 있는데 원장선생님이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원장님 입장에서는 저를 키워보고 싶은 마음에 또 다른 말을 보탰습니다. 재능은 있는데 산만해서 집중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입시미술도 아닌 어린이 미술이니 돈을 버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그 말은 안해도 좋았을 겁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의도는 이러한 부정적인 정보까지 공유한 후에 가정과 학원에서 협력해서 재능을 잘 키워보자라는 의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음 달부터 학원을 바꿔버렸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기분이 나빴던 것이죠. 그 때 자존심이 상한 어머니의 감정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어머니가 경솔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산만했거든요. 어머니는 그 때 일을 저에게 솔직히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진정한 정보는 어디에 있습니까? 타인의 평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탁월해서가 아니고 부모가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무능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녀를 양육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우리가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무능을 인정하면 타인에 의한 자녀의 평가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아이의 문제를 인정해야 그 원인인 내 문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아이의 문제가 아니고 저의 문제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많을 것을 깨닫게 되었고 변화의 희망을 찾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겪을 때 일어나는 일차적인 감정은 부끄러움과 후회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 말을 하는 마음은 알 것 같지만 실제로 후회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고장 나 있는 사람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후회를 합니다. 우리는 다 실수가 많아서 후회할 일을 하지만 후회는 후회로 끝내지 않고 용서와 회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복음은 후회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후회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여전히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은 용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후회라고 하니 킴벌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의 If I Knew 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입니다. 시인은 후회스러운 것을 말하고 있는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은 것, 즐겁게 살지 못한 것, 걱정에 사로잡혀 산 것, 사람을 의식히고 산 것,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지 못하고 산 것,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산 것, 사랑을 열중하지 못한 것, 용기가 없었던 것,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사람과 좋은 것을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후회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란 사랑의 용기입니다. 그 사랑의 용기라는 것은 미숙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시는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그랬디면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때도 알았더라면…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린이 날에 자주 듣는 성경구절입니다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라는 말이 몇 가지 용법을 가지고 사용됩니다.어린아이같이 되지 말라고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 어린 아이처럼은 미숙함이라는 부정적 의미입니다.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라는 것은 분명 긍정적 의미로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순수성을 말합니다. 둘 다 지혜입니다. 하나는 분별하는 지혜이고 하나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이 두 가지 용법이 다 나옵니다.-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를 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기도의 힘이 필요합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마음의 우상을 버리세요. 사랑하는 자녀를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린이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어린이 날에 아이들에 대한 용서의 인내와 사랑으로 교육할 것을 다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