ルカはパウロの回心の証しを使徒の働きにおいて3回繰り返して記録していますが、それはパウロが決定的な伝道の機会に自分の個人的な証しをどのようにして有効に用しているのかを語るためであります。証しというものの意味とその役割を考えましょう。

 

私たちは福音を述べているのに、なぜ福音は力強く広がっていないでしょうか。もしかして私たちが語っている十字架、私たちが語る復活、私たちが語る天国が、私の十字架、私の復活、私の信仰、私の天国になっていない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伝道は教義や神学的な情報を物理的に伝達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福音が自分の命に入ってから起こった化学反応を示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際に伝道における個人の証しというのは不可避なものです。パウロは、この貴重な証言のチャンスに極個人的かつ主観的な経験、そして理性的でもなく、合理的でもない神秘的な体験を持って話しを続けています。自分がひどい迫害者であったこと、光を見て馬から落ちたこと、目が見え見えなくなったこと、イエスさまの声を聞いたこと、再び目を開けたこと、自分が伝道者として生まれ変わったことの話しなど、抵抗することはできない神様の介入を証ししています。

 

宗教的な経験というのは、人によってそれぞれが異なります。モーセは柴に茂みで現れた神様に召されました。ヨナは魚の腹で召しを確認しました。アブラハムの証し、ダビデの証し、ペトロとパウロの証しそれぞれ違います。全く同じ証しを持っている人はいません。ただ、それを証しする人と、黙っている人がいるだけです。神様が自分の中で入られたことを思い出してそれが偶然ではないこと、自分の計画も意志によるものではないこと、それが神様の恵みであることを認め、告白し、また証言をすることができれば、それこそが伝道の言葉です。つまり、福音を自分のものとしてかみ砕く必要があるのです。耳に福音がとどまって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の口の言葉で語れるように消化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アブラハムの神、モーゼの神、ダビデの神、パウロの神よりも大いなる神は誰の神でしょうか?私の神です。自分の神がいなければ、他人の神がどんなに大きくても自分と何のかかわりがあるのですか?もし、他人の天国ならば天国がどんなに良くでも自分と何の関係がありますか?皆さんの神様はいかがですか?クリスチャンと呼ばれるのは、聖書を信じる人ということです。神様のみ言葉が自分の人生の唯一の規範であることを告白できれば、それは信仰の告白です。また、それを自分の言語で語ることができればそれこそが宣教です。聞いた福音を語る福音にすること、福音が自分のものになることを祈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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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 간증, 즉 바울이 박해자 사울의 때에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서 전도자가 되었던 극적인 간증은 사도행전에는 9장에서도 나오고 22장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6장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만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기록해야 하는 내용은 많은데 누가는 왜 이 사도행전에서 똑같은 바울의 간증 이야기를 세 번 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했을까요? 바울의 회심 간증이 대단히 중요한 내용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해서 반드시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편집자가 편집상의 구조 안에서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간증의 스토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려고 반복해서 썼던 것이 아니고 바울이 결정적인 전도의 시점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을 어떻게 얼마나 유효하게 복음 전도의 입구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고 있는 이 중요한 전도의 상황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바울의 간증의 내용을 다시 한번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간증이 참 대단하구나 로 끝날 것이 아니고 그 간증이라는 것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은 바울이 유대 왕 아그립바 앞에게 발언할 기회를 얻은 상황입니다. 지난 3차에 걸린 전도여행에서의 개인 전도와 교회 개척과 신앙교육, 그리고 편지를 써서 보낸 문서 선교의 사역을 활발하게 했지 않습니까? 이 시기에 이미 바울의 신학은 많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교리적인 것을 해설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 회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활용할 수 있는 도구와 재료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접근도 할 수 있고 율법적 접근, 신학적인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비교종교적 접근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정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거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도 있었고 오히려 그런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거기에 복음이 있으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그것에 복음이 있으니까요.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전달되지 않는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서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부적인 원인만 찾지 말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그 원인을 확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우리가 말한 십자가, 우리가 말한 부활, 우리가 말한 천국이 나의 십자가, 나의 부활, 나의 믿음, 나의 천국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없으면 일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어제 내가 지은 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복음의 구체성이 필요합니다. 전도는 교리나 신학적 정보를 물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내 생활에 들어와서 내 안에서 일어난 화학적 반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빛을 본 사람은 빛을 발합니다. 복음을 만난 사람은 복음을 발신합니다.

얼마나 착해지고 도덕적인 인간이 되었는가의 윤리적 문제가 아니고 그 전하려는 것이 얼마나 자기의 것으로 소화되고 체화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우선 듣습니다. 듣고 나서 믿고 안 믿고는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자기가 소화한 복음에 대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나의 것으로 소화하고 그리고 나의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에 있어서 개인적인 간증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에서 개인적인 간증을 많이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설교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잡담이라면 물론 금해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지식과 경험과 인격과 삶 안으로 베어 들어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니 오히려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짧고 소중한 증언의 기회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 그리고 전혀 이성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독한 박해자였던 이야기, 빛을 보고 말에서 떨어진 이야기, 눈이 멀어 보이지 않게 된 이야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이야기, 다시 눈을 뜨게 된 이야기, 자신이 전도자로 거듭나게 된 이야기,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증거합니다.

1절에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변명을 시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어 번역과 한국어 번역에 변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말에는 원래 변증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ἀπελογεῖτο 아펠로게이토 인데 이것이 영어로 와서 Apologetics가 되는데 이것이 변증, 변증학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혐의가 없다는 것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것을 변명의 기회로 삼지 않고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말의 차이가 재미있습니다. 변명이라는 말에는 오해나 혐의를 벗기 위한 방어적인 뉘앙스가 있기 마련이지만 변증이라는 말에는 자신의 신념, 확신, 믿음을 상대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위한 변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한 변증을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와 교회를 핍박한 일,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죄 짓는 일이었습니까? 거기서 자신은 죽었어야 하는 죄인이었지요. 다메섹 사건이야말로 유죄이지 않습니까? 박해했기 때문에 유죄일 뿐 아니라 거기서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이 자신의 유죄를 위해 죽으셨고 또 많은 사람들의 유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르셨던 것이 다메섹 사건이 아닙니까? 9장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간증이라는 것은 바울과 같이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또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적 경험은 각자가 다르고 다양합니다. 모세는 떨기 나무에 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사명을 받았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사명을 확인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증이 다르고 다윗의 간증이 다르고 베드로와 바울의 간증이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간증이 다 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의 간증에는 사랑과 인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있고 증거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은 바울에게만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에게만 나타나시고 나에게는 나타나지도 않으시고 나에게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간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증거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루 하루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현실로 숨길 수 없이 드러납니다. 믿음으로 살아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인생의 어느 시점의 현실로 그 신앙을 드러나십니다. 믿음의 길을 걸으면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인생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야하기 때문에 전도의 말을 생각해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하신 일을 생각해내고 그것이 우연도 아니고 자신의 계획도 의지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증언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전도의 말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까?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침이 튀면 대단히 불결하게 생각하고 닦아내고 씻어내지요. 누군가의 침이 묻은 음식은 안 먹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침은 항상 입안에 가득하고 모든 음식을 그 침과 버무려 먹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불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복음은 내 입안에 들어가서 내 침과 섞여서 나의 것으로 소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에 힘이 됩니다. 귀로 들은 복음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입 안에 넣고 말로 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신비는 합리성이나 이성이라는 도구만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이해한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제대로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정보만으로 신앙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은혜를 묵상하는 것, 해석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신학을 공부한 사람의 지도를 받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신학을 공부했다고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누구라도 기도하고 공부하고 책 읽고 연구하고 해석해서 설교를 만들고 논문을 씁니다.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필요한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것으로 두고 알 수 있는 것을 알아가면 됩니다.

성도들은 목사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십니다. 그것은 참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 목사를 신뢰해주시고 찾아와서 상담하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을 목사에게 완전히 위임한다면 그것은 샤머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신앙의 개인성과 주체성을 절대로 버리지말고 스스로 신앙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저는 “사람은 안 바뀝니다”고 자주 말합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은 참 안 바뀌고 참 고집스럽고 여전히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바뀐 것 같다가도 다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닐 겁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의 문제입니까? 믿음의 문제입니까? 바뀌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왜 안 바뀌는 것입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사실은 안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할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재를 믿는 것인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를 향해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우리 삶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규범이라는 것을 믿고 그 길을 따라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나를 부수고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내는 노력을 할 때 그 때 생각과 행동과 삶이 바뀝니다. “하나님 나를 바꾸어 주십시오” 고 기도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말씀을 매일 주시고 계신데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또 그 말씀을 삶의 규범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누구나 경험하고 주위에서 기적은 항상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시고 먼저 오시니까요. 그러나 그 기적을 경험해도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삶과 인격과 믿음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습관과 자신의 경험을 사실상 더 많이 믿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없으면 남의 하나님이 아무리 큰들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남이 가는 천국이 아무리 좋은 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 개인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얼마나 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규범이라는 고백이 곧 신앙이고, 자기 삶의 언어로 체화된 것을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들었던 복음이 내가 말하는 복음, 내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