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4:26
근동의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보다 더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당시의 문헌이 없기 때문입니다. 2000년전의 핼라어인 코이네 헬라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신약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당시의 언어와 문학과 사회와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내용이 기적처럼 보존되어 있는 책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읽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역사적이고 문학적이고 학문적인 이유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이 인류 최고의 문학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대부분의 시를 쓴 다윗이 만약 이 시대에 살았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잠언이라는 지혜서는 누가 읽어도 부정할 수 없는 탁월한 삶의 지혜를 말합니다.
원래 말과 글은 전달되는 과정에서 변질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메일을 보낼 때도 통화를 할 때도 말과 글이 원래의 의도와 목적에서 왜곡되고 오해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대가 오해하면 비꼬는 말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합니다. 전달자를 거치면서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의 능력과 전달의 능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악의적인 거짓까지도 섞일 수도 있기 때문에 말과 글은 항상 왜곡을 당하고 변질됩니다. 언어는 그렇게 불완전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의 것이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1600년이란 시간에 걸쳐서 40명 이상의 기자에 의해 일관적인 주제를 관통하면서 기록되었고 그 원형이 완벽하게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미 2500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인간의 언어에게는 자연스러운 왜곡과 변질이 성경에는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요?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강의하기 전에 나누어주는 유인물을 읽는 것처럼 성경 본문을 훑어보고 마치 강사의 강의를 듣는 것처럼 목사의 설교를 듣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강의를 들어도 그 주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자신이 직접 시험 답안을 작성하고 자신의 언어로 레포트나 논문으로 정리할 수 없으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다시 가르쳐 줄 수 없으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타종교에 진리가 있다고 하면 펄쩍 뛰며 비판하지만 정작 진리라고 말하는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종교간에 싸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신자의 삶을 그 진리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는 것이 성경을 학습하는 거의 유일한 기회인 분의 신앙은 죄송한 말이지만 성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은 곧 하나님 말씀의 체화에 있습니다. 내 것이 되지 않은 말씀은 관념적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 목사가 잘 준비한 설교가 있다면 그것을 구슬이라고 합시다. 그 구슬을 꿰어서 보배로 만드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인쇄된 문자를 읽고 정보를 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언어학이나 고고학, 문학으로써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를 취한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메세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역설적입니다. 내가 할 만할 때는 길이 막혀 있고 내가 할 수 없을 때 예기치 않은 또 다른 길이 열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예기치 않은 은혜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읽을 수가 있을까? 답을 말하기 전에 비유하나 먼저 말해보겠습니다. 불이 꺼졌다고 해봅시다. 눈을 감아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저의 서있는 모습의 실루엣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눈 안에 빛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곧 사라질 것입니다. 불을 꺼도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보인다고 하는 분도 있지만 그것은 미세한 빛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으면 완벽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 앞에 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존재하지만 내가 인식할 수 없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없다”라고 말해버립니다.
그런데 더듬어 불을 켜봅시다. 조명을 켜고 보면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형태도 보이고 색도 보이고 아무 것도 없던 것 같았는데 조명을 켜고 보니까 깊이도 있고 넓이도 있고 크기도 있고 높이도 있고 그것들이 보입니다. 혹시 색각이상자를 위해서 개발된 안경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 안경이 개발되었습니다. 색각이상자는 형태는 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색을 구별해내지 못합니다. 꽃의 형태는 볼 수는 있는데 그 꽃의 색깔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한 색각이상자 아빠가 가족에게 그 안경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안경을 쓰고 집 앞에 피어 있는 꽃을 봤습니다. 그 사람은 난생처음 그 꽃의 색깔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하더군요. 여러분 들꽃 한송이의 색깔 때문에 펑펑 울어본 적 있습니까? 그 화면을 보고 저도 같이 눈물이 났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그 사람 주위에 꽃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꽃은 항상 있었습니다. 색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름다운 색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 날 보인 것입니다. 문자로 읽을 때는 아무 감정이 없다가 무엇인가 불이 켜지듯이 그 말씀이 조명되니까 눈물이 쏟아집니다.
불을 켜든지 안경을 쓰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와 색채를 읽어내려면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 조명이라는 것이 아까 말했던 그 예기치 않은 은혜입니다. 성경은 조명되어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읽히기 시작합니다. 어둠 가운데서 내가 보려고 노력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조명되니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조명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믿으십니까? 성령을 믿지 못하면 결국 아무 것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면 성경은 읽어도 그저 문자일 뿐입니다. 저는 문학과 역사와 고고학과 언어학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문학과 고고학과 언어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자주 오해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가 아닙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 곧 하나님의 자신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쓴 사람을 저자라고 하지 않고 기록한 사람이라하여 기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고 그 성경이 왜곡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도록 지금도 지키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지요.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신 사건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함께 식사하고 생활하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한 사건이 나옵니다.-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급하고 강한 바람, 불의 혀같이 갈라지며 임한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나서 불안하게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성령은 역할은 뭐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입니다.-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그런데 생각나게 하리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잊어버렸던 음성 언어를 기억해냈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 말씀하신 뜻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해석이 달라집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아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나서 제자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성육신으로 보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고 나서 선교가 시작되고 성령이 오시고 나서 교회가 세워집니다. 요한복음 14장26절의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복음을 깨닫게 하여 선교에 동참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을 성취하십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 모인 사람들이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로 방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비한 사건이지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던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문화와 언어를 초월해서 소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이 있어도 우리는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문화와 언어가 여기 모여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이 있으면 서로를 배려할 것이고 우리 안에 성령이 있으면 서로 소통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있으면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있으면 복음을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있으면 선교가 시작될 것이고 선교가 진전될 것이고 기어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어제와 그저께, 금요일과 토요일은 한국 충현교회의 단기선교팀이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의 어린이들과 이 주변지역 어린이를 초대해서 여름 성경 캠프 봉사를 했습니다. 40명이 넘는 아이들이 와서 복음을 듣고 즐겁게 놀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였기 때문에 복음이 기뻤고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 봉사를 위해서 여름 휴가를 미리 당겨서 썼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7월과 8월에는 휴가없이 일해야 합니다. 각자 자신이 돈을 내서 항공권을 사고 아이들 선물을 사고 이 선교를 위해서 6개월을 매주 모여서 준비했습니다. 헌신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밭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전 재산을 들여 밭을 사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보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헌신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이 교회 절기로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선교의 전진과 성취를 위해 동경을 선교하는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와 서울에서 선교하는 충현교회, 그리고 오늘 모인 모든 분들과 단기선교팀 그리고 이틀동안 복음을 들은 아이들과 그 가정들, 고향의 집 동경의 어르신들 직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해 주시는 성령이 힘있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