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설교에서 바울 일행이 타고 로마를 향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배는 광풍을 만나 지중해 서쪽으로 밀려나 보름간 표류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고 모진 광풍으로 승선자들의 구조의 소망과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탈진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그 배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예언하신대로 276명 전원이 생명의 손실을 입지 않고 구원되어 육지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고 보니 그곳의 이름은 멜리데라는 섬이었습니다. 멜리데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남쪽으로 9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남단의 섬입니다. -28: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원주민들은 바울 일행을 친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다에서 헤엄쳐서 나온 사람들의 몸은 젖어있었고 씻을 곳도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고 쉴 곳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었으니 한기가 들었을 것입니다. 보름 넘게 표류 생활으로 인해 체력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멜리데의 주민들은 이들을 위해 불을 피워서 바울 일행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닷가에 나타난 조난자 276명, 그 많은 사람에게 불을 피워주고 따뜻한 마실 것을 내어주고 덮을 것이라도 가져다 주려면 온 동네 주민이 동원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표류자들을 특별히 동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나 당연한 이유같지만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곤란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동정(친절)으로 번역된 헬라어 ‘φιλανθρωπίαν 필란드로피안’ 은 ‘사랑하다’ 라는 뜻의 ‘φιλέω 필레오’라는 말과 인간을 뜻하는 ‘ἄνθρωπος 안드로포스’ 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동정(친절)은 인간을 사랑하는 인류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멜리데섬 원주민들은 어떤 이해(利害)나 조건없이 곤란에 처한 낯선 사람들에게 보편적 인류애로 자비와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3절에서 바울이 뱀에게 물렸을 때 섬사람들은 바울에 대해서 이 사람은 진실로 살인자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바울이 광풍 속에서는 겨우 살아남자 마자 독사가 그 손을 문 것을 보니 그가 저주받은 살인자임이 분명하고 신이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주민들은 그 시점에서 이미 배에 탄 사람들 중에 살인자를 포함한 범죄자 호송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이 지역 주민들은 곤란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섬 사람들은 순수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토인이라 하여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토인이라고 번역했을 뿐 원주민을 말하는 것이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배가 정박할 정도로 그들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행과 친절에 대해서 말할 때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러한데 우리는 더 도덕적이고 더 희생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논리로 자주 말합니다. 물론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보다 사랑과 자비가 부족하고 인간성이 부족하다면 신앙이 어디에 서 있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선한 것에 자극을 받아 더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 그것 자체가 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더 우월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궁극적 목적도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것의 본질은 도덕성과 인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구원받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도덕적 우월성을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도덕성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탁월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당연히 존경과 감사를 표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을 들여다 봅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기독교 교양은 어떻습니까? 표류하는 난민들 중에 타종교인들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거절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교파를 구별하고 기독교를 국적에 따라 구별하고 배척합니다. 외국인을 잠정적 범죄자로 취급합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것 때문에 생기는 불편을 감수하기 싫어합니다. 문화 안에서 사는 종교라면 그럴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외부에서 자비와 배려와 친절이 실천됩니다.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영역의 밖에서 실천되는 보편적 인류애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인간적 사랑이라고 치부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인본주의적인 자기 의를 위한 선행이라고 평가절하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신자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할 일이지 신앙의 동기가 아니라고 해서 사회적 선을 무가치한 것으로 끄집어 내려서는 안됩니다. 백부장이 죄수들을 죽이자고 했던 군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도망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헤엄쳐서 섬으로 들어가게 한 것도 물론 바울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편적인 인류애가 백부장에게 있었던 것이고 기독교 신앙은 그런 자비와 친절과 배려에 배치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기독교인 바울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살았지 않습니까? 배에는 죄수도 있고, 군인도 있고, 상인도 있고, 여행객도 있었습니다. 그 배 안에는 교회 구성원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배격하고 그것과 분리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선과 인류애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울을 돕고 있고 바울은 곧 그들을 도울 것입니다.
불을 피우는 동안에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원주민들은 곧 바울이 죽을 줄 알았지만 바울은 쓰러지지 않고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해를 입지 않게 하셨습니다. 아니 바울이 결코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이제 복음을 전하러 나갈 전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이 지역 멜리데를 돕고 계시고 멜리데 사람들을 통해 바울을 돕고 계신 것입니다.
멜리데섬의 원주민들에 의해 신으로 소문이 난 바울이 그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보블리오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바울과 일행은 사흘 동안 좋은 대접을 받으며 쉴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 집에 머물면서 열병과 이질로 고생하던 그의 부친을 고쳐주었고 또 몰려온 지역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여 주었기 때문에 지역에 큰 호의를 얻게 됩니다. 섬사람들에게 있어서 바울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바울이 그것을 가만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이 섬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한 지역의 지도자 보블리오가 멜리데의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멜리데섬에서 초대교회가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지하묘지 카타콤까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초기기독교 시대에 멜라데섬이 복음화되었던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98%가 로마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처음 씨는 바울이 뿌린 것이고 하나님은 멜리데 섬에서 바울을 쉬게 하면서 그 섬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섬에는 지금도 매년 2월10일이면 성바울 난파 축제 The Feast of St Paul’s Shipwreck 가 열립니다.
믿음으로 떠나는 자는 위기도 만나고 어려움도 만납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만나는 위기를 당하고 독사에 물리는 것과 같은 위기를 당하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 안에 드러나십니다. 가만히 머물러 있는 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순종하는 성도가 당하는 위기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기회가 됩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에게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됩니다. 믿음은 마음 속에 다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확인하는 과정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멜리데라는 섬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봅시다.-28: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멜리데라는 지역 이름의 어원은 페니키아어로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누가가 28장 1절을 이렇게 쓴 것은 의도적입니다. 광풍에 살아남고 보니 그 섬 이름이 피난처더라 라는 말입니다. 멜리데는 작은 섬이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베스트 10 안에 들어가는 미니 국가입니다. 1964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멜리데는 몇 가지 소개할만한 특징이 있는데 2007년 미국의 『인터내셔널 리빙』이라는 잡지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이곳을 꼽았습니다. 현재 한국어 발음으로는 몰타라고 부릅니다. 아주 아름다운 휴양지입니다. 유럽사람들은 은퇴 후에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는다고 합니다. 아마 올해도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멜리데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많을 겁니다. 관광객의 숫자가 국민의 수를 항상 넘어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조난하여 온 때처럼 멜리데 사람들은 항상 평화롭고 친절하다고 합니다.
멜리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멜리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랜싯』이라는 의학 저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장 게으른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3위가 사우디 아라비아, 2위가 스위스, 1위가 몰타라고 합니다. 게으르다면 부정적이지만 좋게 말하면 천천히 느긋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멜리데에서는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답니다. 이곳도 당연히 시에스타 즉 낮잠을 자는 풍습이 있어서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는 전 국민이 문닫고 낮잠을 잡니다. 몰타에서는 느긋함이 일상입니다. 그렇게 느긋하게 생활할 수 있는 이유가 기후일 것입니다. 멜리데는 1년 중 300일 이상이 지중해의 쾌청한 맑은 날씨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원주민들이 비가 오고 추워서 일행을 특별히 동정했다고 했는데 원주민들은 그런 불쌍한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몰타는 원래 비가 거의 안 옵니다. 몰타는 지중해성 기후는 여름은 기온이 높고 건기가 지속되고 겨울에만 조금의 비가 내리는데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비가 아니랍니다. 그래서 몰타 사람들이 행복하답니다. 아마도 그들이 행복했기 때문에 바울 일행에게 주저함없이 도움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28장은 10절까지 끊어 읽는 것이 맞지만 10절까지의 이해를 위해서 11절까지 읽어야 합니다. 11절에 보면 사흘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 후 석 달을 더 머물렀습니다. 지난번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당시 지중해를 배는 겨울철 3개월 동안 항해를 중단하는 것이 당시 해상의 규칙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이 멜리데에서 보낸 3개월은 겨울 3개월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11월부터 2월초순 정도였을 것입니다. 성바울 난파 축제 The Feast of St Paul’s Shipwreck 가 2월10일인 것은 바울이 떠난 날이 2월10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이 도착했던 때의 멜리데는 겨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멜리데의 겨울은 일본과 한국의 겨울과는 다릅니다. 일본과 한국의 봄이나 가을 날씨와 비슷합니다. 춥지 않습니다. 겨울철에도 10~ 17도를 유지합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은 3개월간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일시정지, 잠시 멈추어 쉬어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셀라’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음악의 간주 부분처럼 잠시 노래를 멈추고 악기만 연주하거나 잠시 쉬어갈 때 사용합니다.
히브리어로 셀라는 “잠시 멈추어 듣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셀라’의 시간은 중요합니다. 이 시간은 잠시 멈추는 시간입니다. 바쁜 삶의 일상을 멈추고 영혼의 쉼을 갖는 시간입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 일시정지해야 할 곳에서 일시정지해야 위험한 것들이 보입니다. 지난 주 병원에 입원했다가 어제 퇴원했습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가 아파서 걱정했는데 맹장이라고 해서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스톱(stop)이 아니라 포스(pause)였습니다. 쉴 때 하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리고 주님이 우리 삶을 향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병원에서 하나님 음성은 더 친밀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친절해진 것이 아니라 제 마음과 귀가 열린 것이겠지요. 이제 입원한 성도의 병문안을 가게 되면 제가 기도하지않고 기도를 받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거기서 더 잘 들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멜리데에서 일시정시하는 동안에 광풍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 쉼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대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저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멜리데에서 쉬고 있다가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멜리데에서 로마를 그리게 하셨을 것입니다. 잠시 멈춘 멜리데에서의 시간, 보십시오. 풍랑과 독사는 죽음의 위기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안식과 위로였습니다. 가만히 멈추어 서면 자신을 향한 약속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일시정지, 잠시 멈춤의 은혜, 안식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스톱(stop)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동안에 사명을 위해 플레이(play)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일시정지(pause)라는 은혜의 시간에는 또 멈추어 서서 쉬면서 삶과 믿음을 통찰해야 합니다. 셀라의 시간, 음미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어나 가야할 길을 가야합니다.
오늘 예배의 시작에 읽은 시편 46편입니다.-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46: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46: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46: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배에 탄 사람들은 모든 물건을 배에서 던져버렸지만 멜리데 사람들은 로마로 갈 때까지 필요한 것을 선물로 다시 배에 실어주었습니다. 필요는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자기 길 가는 사람은 자신이 채워야 하고 그것을 다 지고 가야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길 가는 사람은 버리고 가지만 다시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제 많이 늙어버린 노사도 바울은 아직 남은 사명의 길 로마를 향해 가야합니다. 곧 8월이 시작됩니다. 바울이 멜리데에서 보낸 휴양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일시정지의 안식과 은혜가 우리 공동체에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