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가택연금상태로 2년을 지내게 됩니다. 지하감옥이 아닌 가택연금이라서 다행이었습니다. 비록 외출은 할 수 없었지만 외부의 손님이 방문하는 것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또한 다행이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안되지만 찾아오는 사람을 만날 수는 있었습니다.
바울은 가택연금생활이 시작되자마자 먼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유력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해를 풀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라는 것, 그리고 자신도 유대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며, 유대사회와 율법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려고 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복음이 아닙니까. 비록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바울을 대적하고 있지만 바울이 그것에 응대하여 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이른바 ‘이스라엘의 소망’을 품은 한 사람이며, 자신이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유대인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변명과 호소를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유대인들은 바울의 믿음과 신학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한번 들어보겠다고 약속합니다. 대단히 신사적이고 지적입니다. 역시 당시 세계의 중심 로마의 시민의 교양을 가진 로마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는 달라서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던 같습니다. 바울을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신앙 즉 복음을 끝까지 설명해 본 적이 있습니까?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여서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 남김없이 소개하고 피력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 한 번 와보라는 권면의 말 말고 자신의 복음을 정리하여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는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저의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경험이고 기억입니다. 돌아볼 때 저의 신앙생활에 어떤 변화나 성장이 있었다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들은 말 때문이 아니고 내가 누군가에게 신앙을 증거할 때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언어는 귀로 들었던 남의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입으로 내뱉었던 말들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고집스러운 사람들 자주 만납니다. 그 분들은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이전에 했던 말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합리적인 말을 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자신을 강하게 교육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는 믿든 믿지 않든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꼭 자신의 신앙을 언어로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해 보십시오. 스스로 신앙을 어떻게 말하는가는 곧 심판날에 드러날 자신의 신앙의 실체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는 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가 믿는 것이 일본 사회 안에서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래서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한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모든 사건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오실 것도 믿어야만 합니다.
전도는 특수한 은사나 직분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교회 생황을 시작할 때 저를 전도해 준 사람에게 교회에 나가는 대신 조건을 하나를 걸었습니다. “앞으로 예배에는 참석하지만 절대로 전도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는 전도사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신자의 믿음이 건강한 상태의 믿음일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어봐야 노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몸이 아파 봐야 병자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나아봐야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설명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보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전도를 해보지 않으면 죄인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알 수 없습니다.
전도를 해보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도를 하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도를 해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왜 죄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전도를 해보지 않으면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는 전도를 해 본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누군가를 품고 전도의 말을 건넸을 때, 오늘 바울 앞에 선 로마의 유대인들처럼 그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행운입니다. 원래 그런 행운은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신앙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두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 됩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을 살리고 그리고 복음을 말하는 자신을 살립니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디모데 전서, 바울은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아들 같은 후배 사역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4:10 私たちはそのために労し、また苦心しているのです。それは、すべての人々、ことに信じる人々の救い主である、生ける神に望みを置いているからです。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4:11 これらのことを命じ、また教えなさい。
4: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4:13 私が行くまで、聖書の朗読と勧めと教えとに専念しなさ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4:15 これらの務めに心を砕き、しっかりやり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の進歩はすべての人に明らかになるでしょう。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4:16 自分自身にも、教える事にも、よく気をつけなさい。あくまでそれを続けなさい。そうすれば、自分自身をも、またあなたの教えを聞く人たちをも救うことになります。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전도는 복음을 듣는 자를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自分自身をも、またあなたの教えを聞く人たちをも救うことになります)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도 그 증거를 구원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이든지 신앙생활에서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것, 그것이 없이는 결코 신앙이 성립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전도입니다.
교회에 사람 수 늘리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말을 듣는 귀보다 전도의 말을 하는 입에게 더 많은 복음의 소망을 주십니다. 이것은 미숙한 저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서 수많은 성도의 인생과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검증되고 확증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지만 전도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은 항상 소수입니다. 그리고 믿지만 전도의 말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좁고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은 항상 적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저는 청년시절에 학교가 치바에 있었는데 치바에서 전철로 서너 시간 걸리는 요코하마 아오바다이에 있는 일본어 학교까지 가서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정기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갔습니다.
거기서 많은 유학생을 만나서 전도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에 혼자 서서 전도하고 있는 사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런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에도 그 때 불타던 전도의 동역자들이 몇 명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을 온 사람들 눈에 저 같은 사람은 종교에 빠진 이상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치바에서 신주쿠로, 신주쿠에서 시부야로, 시부야에서 전원도시선타고 아오바다이까지 가서 학교 문 앞에 서서 전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제 말을 들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같이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저도 가난한 유학생이었지만 점심값은 제가 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제가 그 사람에게 했습니다.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했습니다. 시간과 돈을 사용하지 않고 전도할 수 없습니다. 시간과 물질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소중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해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몇 년 동안 몇 시간이 걸려서 찾아가도 아무도 내가 전하는 복음을 들어주지 않는데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친구와 같이 밥을 먹으면서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도 교회를 다녀보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제가 다니는 교회는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교회라도 꼭 다니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그 전도의 이야기는 끝입니다.
그 후 6년 뒤에 저는 동경기독교대학 학부 3학년에 편입학을 했습니다. 학교 수업 첫날 강의동 복도에서 누군가가 저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인사를 하더군요. 처음엔 누군지 몰랐습니다. 제가 요코하마에서 전도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신학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보다 1년 먼저 신학교에 와 있었더군요. 저는 아오바다이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진 후에 그 친구가 교회를 제대로 다녔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신학생 동료로 다시 만났습니다. 신학교 4년내내 지겹도록 고맙다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그 친구는 2학년에 편입했기 때문에 저와 같이 졸업을 했고 저는 동경기독교대학 신학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친구는 한국의 신학대학원으로 갔습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귀라는 것은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과 신념을 가진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청력의 기능이 아니고 인격의 기능이고 지성과 교양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열어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선택되고 구원받은 성도의 은혜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것에 저항하여 받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것은 귀가 열리고 지각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믿어지는 은혜를 말합니다. 믿지 않는데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는 은혜입니다. 저는 분명히 그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줄로 믿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종교를 불신했습니다. 자신들의 유대종교와 유대 사회가 바울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통적 유대교에게는 바울이 전하는 것은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대제사장에게 정치적으로 선동되거나 바리새인의 부패한 종교에 오염된 편협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바울에게 말합니다. 자신들은 유대 예루삶렘으로부터 당신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정보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신들의 판단 하에 바울의 해석과 주장을 들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들어보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분별은 내가 듣고 내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분별을 대신 해준다는 말입니까? 내 안에서 일하는 성령이 계신데 누구에게 그것을 맡긴다는 말입니까? 음성언어정보는 귀로 듣을 수는 있지만 자기 지적체계 안에서 해석이 안되면 실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해석을 따라 사는 것으로는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생황을 할 수 없습니다.
해석력과 분별력은 신자가 가져야 하는 자신만의 권리이고 책임입니다. 목사이든 부모이든 대제사장이든 바리새인이든 어떤 사람에게도 그 책임과 권한을 양도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읽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읽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는 것이 그렇게 쉽습니까?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데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모르면 믿을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배우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그런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 교단의 신앙고백 제 1조도 그것으로 고백을 시작합니다.
1.旧、新約聖書66巻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って記された誤りのない神のことばであって、神の救いのご計画の全体を啓示し、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を顕し、救いの道を教える信仰と生活の唯一絶対の規範である。
신구약 성경 66권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전체를 계시하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어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규범이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삶의 규범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계십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를 소개합시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인간의 증언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의 저자이시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의 주체는 여러분 각자가 되어야 합니다. 해석하기가 무서우면 해석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질문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적 고민은 대부분 그 답이 이미 다 책으로 나와있습니다. 읽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글과 말로 표현하고 믿음의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그러면 교정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정리되어 갈 것이고 성장해 갈 것이고 성숙해 갈 것입니다. 우리는 해석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왜 힘을 잃은 식물교회가 됩니까?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성도는 해석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교리만 외우게 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것만 외우라고 했습니다. 질문하면 믿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삶을 살아보니 삶이 암기하면 과목이던가요? 하나님이 객관식 시험문제이던가요? 벼락치기로 삶이 성장하고 암기로 신앙이 성숙하던가요?
그래서 무지해져버린 교회가 교권에 의해 유린되고 타락하고 온갖 범죄의 사각지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경제활동을 위해서 법률도 배우고 투자도 배우고 자격증도 땁니다. 신앙생활을 위해서 삶과 신앙의 유일한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은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동산투자의 정보는 교류하고 자녀교육에 관한 정보는 늘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묵상과 해석은 교류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르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믿는지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뼈대와 근육을 키워서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와 세상을 읽으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책임입니다.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데 있어 질문이 없으면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것, 맹목이 되어서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 내립니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했지만 내면에 신앙이 이미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신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모르는데 배우려고 하지 않고 믿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택연금 상태에서 유대인들에게 성경강의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수락했습니다. 들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배워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으면 죄에서부터 구원하시는 기적, 복음은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바울이 연금된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바울의 기독교입문 강의를 듣게 된 것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집을 찾아 강의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갇힌 채로 오직 강의준비에 열중했을 것이고 바울의 집에 와서 그 강의를 들었던 사람은 다시 와서 질문했고 두 번째 강의와 세번째 강의를 이어서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개설된 바울의 복음 강좌는 그렇게 시리즈로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바울의 복음은 더욱 망라되어져 갑니다. 이 시기에 강의와 함께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네 권의 옥중서신을 발신합니다.
구약성경을 구분해 보면 율법서와 선지서, 그리고 시가서와 지혜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바울이“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 가르쳤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을 강의 텍스트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구약선생인 바울의 강의를 듣지 않을 유대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약성경을 텍스트로 해서 새로운 해석을 가르쳤습니다. 구약의 가장 큰 주제는 지난주에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소망, 즉 선택한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입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구원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원을 소망합니다. 그 주제를 강의에서 풀어나간 것입니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강의를 하긴 했는데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からイエスについて彼らを説得しようと)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예수라는 이름의 고유명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일관되게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오실 메시야가 이미 오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 구원의 진리입니다.
바울이 복음강좌를 시작했던 그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진실의 입’이라는 돌이 있습니다. 그 돌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도 나오지요. 거짓말을 하면 그 진실의 입이 팔을 물어버리는 전설이 영화의 에피소드로 등장합니다. 그레고리 펙이 거기에 손이 집어넣었다가 손이 먹힌 시늉을 하고 오드리 햅번은 정말로 팔이 잘린 줄 알고 놀라는 신이 있지요.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 연애 연기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금도 줄을 서서 그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진실의 입이라는 돌은 원래 신전에서 쓰던 하수구 뚜껑이었습니다. 하수구 뚜껑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할 리는 없습니다.
바울은 신전의 하수구 뚜껑으로 만든 ‘진실의 입’이 아닌 ‘진리의 입’이 되어서 로마에서 구원의 소망을 강의합니다.
그러고 보니 바울이 몰타섬에서 겨울을 지내고 로마에 들어갔으니 성경공부회가 시작된 당시 로마는 봄이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배경도 아름다운 로마의 봄이었지요. 바울은 지하감옥이 아닌 로마의 한 가운데에서 로마의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복음강좌를 열었습니다.
진실의 입 앞에 줄을 서서 영화 주인공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보다 훨씬 오랜 역사 동안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진리를 말하는 집,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입문, 복음을 강의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모든 문화와 모든 언어와 모든 인종에 대해서 복음의 강좌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복음을 말하는 것은 쉬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