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보다 좋은 하늘의 고향」
히브리서 11:13-16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도 나이가 들수록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한국의 오봉은 중추절, 음력 8월 15일입니다. 지난 금요일이 추석이었고 한국은 오늘까지 추석연휴입니다. 한국분들 중에는 고향에 가지 못해서 서운한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한국에 가진 못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신앙과 고향에 대한 주제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현세에 필요한 것을 충족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이름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죽을 위기에서 살아나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픈 몸이 치유를 받고 궁핍할 때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곤란한 중에 도움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신앙의 관계안에서 일어난 일이지 그것 자체가 기독교가 말하는 궁극적 의미의 구원이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의 이유를 마음의 평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입니다. 신앙은 자유를 주고 자유는 마음의 평화를 줍니다. 평안하지 않다면 자유롭지 못한 것이고 그것은 신앙이 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안이 주어지는 것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도 신앙의 결과이지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 영화 중에 기독교를 비하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반발을 샀던 ‘밀양’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그 영화는 안티 기독교이니 보지 말라며 성도들에게 주의를 많이 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가서 봤습니다. 무엇을 비판하는지 알지 못하면 변명이든 반론이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가서 봤더니 기독교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는 신학적 과제를 먼저 고민하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에 출연한 송광호가 극중에서 그러더군요. “교회 안 나가면 좀 찝찝하고 나가면 쪼매 마음이 편해지고…” 아마도 그 대사에 공감을 한 사람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주일성수 안 하면 나쁜 일 생길 것 같고 나와봐야 그저 그렇고 다만 마음은 좀 편한 것 같고….혹시 우리도 그런 이유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누구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신앙이 성장해 가는 것이겠지만 마음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신앙생활, 그것은 분명히 오해이고 그런 오해를 일반화해서는 안됩니다.
부패한 종교는 사람을 속이고 강제하겠지만 신앙은 속일 수도 없고 강제할 수도 없습니다. 속인다고 강제한다고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일을 성수합니다. 이전도 지금도 이제부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예배를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교직이 되기 전에도 예수를 믿고 개인사정으로 주일 예배를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저 뿐만이 아니고 여러분에게 있어서도 있어야 하는 동일한 신앙적 가치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부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예배가 왜 기쁜 것인지를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여러분에게 주일을 지키라는 규칙만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요를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기쁨을 전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강요받은 예배가 기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쪼매 마음이 편할 뿐, 마음의 부담을 덜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의로울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예배의 순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천국은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의 천국은 어딘가 있을 막연한 미지의 세계이거나 종교적인 이상향은 아닙니까? 신앙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인생이 무엇인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생을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인생이 나그네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실 분은 없으실 겁니다.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고 어리석어 집니다.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각자의 정해진 때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작별인사도 없이 모든 것을 놓고 가야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은 이방인이고 모든 인간은 외국인이며 나그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1980년 4월 한 세기의 최고 지성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가 폐수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답게 기독교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 가르침 없이도 충분히 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비판했던 사람입니다. 사르트르는 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를 가르쳤지만 입원한 이후 정작 자신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광기에 가까운 불안을 드러냈습니다. 의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자 의사에게 물건을 던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측근들은 면회를 제한하기까지 했습니다. 투병 한달만에 사르트르는 죽었고 프랑스의 한 신문에는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사실이 사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고 죽음을 그토록 거부하게 했다.”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 기자였겠지요. 그러나 분명 이 이야기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모습을 대면하게 됩니다. 사르트르가 생전에 한 말 중에 『노인은 자기가 노인이라는 걸 느끼지 못한다…결국 나의 늙음이란 나를 향해 늙었다고 말하는 남의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학자다운 통찰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것을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해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본다면 『사람은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결국 자신의 죽음이란 자신을 죽었다고 말해주는 남의 것이다….』 인간은 그토록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공부의 양과는 상관없습니다.
고난 중에는 죽음을 생각하지만 행복할 때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 착각은 곧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와 닿지는 않는다”는 말 또한 “하나님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나 하고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허무한 육체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본향을 찾아 돌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이라고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하나님이 창세 전에 나를 이미 지으시고 선택하셨다는 그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믿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외출을 마치고 천국에 돌아갔을 때 그곳은 결코 낯선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지각이 고장나 있기 때문에 기억하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하지만 그곳은 원래 내 영혼이 거하던 곳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처음의 그 때처럼 완전하게 죄가 없는 곳입니다.어릴 때 주일학교 다니신 분은 많이 불렀지요?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오늘 그 하늘 나라의 주소를 다시 확인해 봅시다. 그 구원열차는 환상특급열차가 아니고 귀성열차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원래 내 집으로 귀성하는 것, 돌아가는 것, 천국은 원래 내 영혼이 있던 곳, 나의 출처인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원래는 돌아갈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구원의 신앙이라는 것은 잃어버렸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차표를 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한 일, 복음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옆에 사람이 없으면 고독해서 살 수가 없지요. 고독에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인간은 고독이 길어지면 병듭니다. 고독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사회적 관계를 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이제 귀찮고 미워진다는 것입니다. 싸우고 서로 상처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치고 받은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제가 사모하는 내 고향, 돌아가야 할 고향은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곳입니다. 고독도 미움도 없는 곳, 오직 사랑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것이 내 고향입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시면서 나에게 쥐어 주신 그 귀성열차표 가지고 열차에 타보니 열차는 완행열차입니다. 고향 행 열차, 천국 행 열차를 타긴 했는데 인생 구석구석마다 다 정차하고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타는 시끌벅적한 완행열차입니다. 고독과 소란을 반복합니다. 그리워하는 마음과 상처받기를 반복합니다. 만약 천국에 죄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천국도 아니고 소망할 곳도 아닙니다. 죄가 여전히 남아 있다면 저는 그런 내세를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구원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그것이 내세의 조건이고 소망이라면 그것은 나에게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돌고 도는 억겁(億劫)의 죄의 굴레를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저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행위의 이유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한 행위라는 것에 필연적으로 악한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 것으로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는 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고향이 어디라고 생각하며 사는가 입니다.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떠나온 고향이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우리를 제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많은 사람들은 고향보다 좋은 천국의 고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다가 그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본향을 고향과 비교해서 ‘더 좋은 본향’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본향’이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일본어로는 더 나은 고향, 하늘의 고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시민권이라고 말합니다.-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믿음 안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이 땅에 정착해서 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 땅에서 ‘타국인이요 순례자’ 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창세기 23장에서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동일하게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39:12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8:20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이 땅은 잠시 머물다 가실 곳이었기에 예수님도 집이 없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난과 시련 중에 믿음 생활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부를 때 ‘나그네와 행인’ 이라 불렀습니다.
돌아보면 함께 믿음의 걸음을 시작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 주위에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제가 신앙을 배웠던 교회는 군대보다 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믿음들이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면 사람을 넘어질 때 다 무너집니다. 성도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습니다. 인생이 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너무 비난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세상이라는 말은 세상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신을 말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살아보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과 자신이 의지할 수 있던 것이던가요? 나그네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욕심을 버리고 기어이 돌아갈 더 나은 고향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임을 잊고 이 땅에 안주하려고 할 때 당연한 결과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것들에 과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버립니다. 결국 그것들을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렸을 때 감당하지 못하도록 분노하고 절망합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하며 살았던 이 나그네 의식 안에서만 경건이 있고 신앙이 있습니다. 그곳은 나그네의 길을 모두 마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본향 집입니다. 사람들은 죽고 점점 사라져가는 고향집에는 못가지만 흔들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본향에 소망을 두고 나그네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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