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9月29日
「사도행전을 마치면서」
사도행전 28:30,31
설교 조용길 목사

사도행전 마지막 시간입니다. 2015년 5월에 사도행전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 설교를 마치는데 4년 4개월이 걸렸습니다. 성경은 모두 몇 권입니까? 구약성경이 39권이고 신약은 27권, 그래서 신구약이 총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년에 한 권 밖에 설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저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에 성경의 몇 권이나 설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기도회의 경우는 설교가 끝나고 나면 매일 창세기부터 순서대로 성경 한 장 씩을 읽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잠언31장의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읽었으니 이제 전도서를 읽을 차례입니다. 전도서는 10월의 아침에 읽기에 참 잘 어울리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2016년부터 4년 동안 매일 아침 한 장 씩 읽었는데 이제 겨우 절반을 넘었습니다. 일독하려면 앞으로도 3-4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성경의 방대함과 우리의 게으름을 생각하면 우리는 과연 삶을 마치기 전에 성경을 한 번이라고 제대로 읽어 볼 수는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도 미전도 종족에게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을 위해서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열정을 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배우거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복을 많이 받겠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야 권면할 일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서 받을 수 있는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읽으며 사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목적이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합니까? 기도하면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상황이 다르니 각자가 기도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관념이 아니 듯이 기도도 기도에 대한 응답도 관념이 아니고 실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했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복입니다.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복 받으려고 믿으십니까? 믿은 것이 복입니까? 낚시 바늘이 입에 걸린 물고기처럼 신앙생활 하시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않습니까? 물고기는 미끼가 없으면 물지 않습니다. 먹이를 추구하여 미끼를 따라 다닙니다. 하나님은 낚시꾼이 아니시고 우리는 미끼를 찾아다니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유하십시오. 진리가 없는 것처럼 살던 방식을 버리고 우리 믿음 안에 진리가 있다면 자유하십시오. 자유는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때 주어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분리된 자유가 아닙니다. 말로는 진리와 자유를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고민과 걱정밖에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양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구할 것은 더 많은 것이 아니라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위해 버릴 것을 각오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일상의 말씀의 해석과 순종의 실천이 없는 신앙이야말로 관념이 아닙니까? 성경구절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의 욕심이라는 미끼 때문이라면 우리에게 자유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생은 짧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갈 수 있는 기회는 더 짧습니다.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도 길지 않고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믿음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운 날이 지나고나니 어김없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도 곧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사명의 기회도 길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회도 영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주 짧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지난주에는 한국에 장례가 있어서 잠시 다녀왔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시간이 여지없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제가 어릴 때 살던 곳에 가보면 여실하게 느껴집니다. 새 건물이 생기고 또 없던 길도 생겨서 좋아진 것 같습니다.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발전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망하더군요. 주위를 돌아보니까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없었던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 있지만 시간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즉 시대가 변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았던 시대에 세상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늙거나 사라졌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 한 분의 죽음에 대해서 인사를 하고 왔습니다. 시간을 흐르고 사람은 죽고 시대는 변합니다. 이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내일부터 전도서를 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1장을 미리 읽어봅시다.

1:2 空の空。伝道者は言う。空の空。すべては空。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3 日の下でどんなに労苦しても、それが人に何の益になるだろうか。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1:4 一つの世代が去り、次の世代が来る。しかし、地はいつまでも変わらな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1:5 日は昇り、日は沈む。そしてまた、元の昇るところへと急ぐ。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1:6 風は南に吹き、巡って北に吹く。巡り巡って風は吹く。しかし、その巡る道に風は帰る。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 던 곳으로 돌아가고

1:7 川はみな海に流れ込むが、海は満ちることがない。川は流れる場所に、また帰って行く。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1:8 すべてのことは物うく、人は語ることさえできない。目は見て満足することがなく、耳も聞いて満ち足りることがな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1:9 昔あったものは、これからもあり、かつて起こったことは、これからも起こる。日の下には新しいものは一つもな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10 「これを見よ。これは新しい」と言われるものがあっても、それは、私たちよりはるか前の時代にすでにあったものだ。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1 前にあったことは記憶に残っていない。これから後に起こることも、さらに後の時代の人々には記憶されないだろう。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미국에 실리콘 밸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반도체 공장들이 모여들었는데 반도체 재료가 실리콘이라서 실리콘 밸리라고 불렸습니다. 실리콘은 규소입니다. 이 규소라는 것이 흙에서 추출합니다. 첨단과학이 반도체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고 스마트폰을 만들어냈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1차 원료, 흙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도체는 그 흙으로 만듭니다. 여러분은 현대과학이 흙으로 반도체를 만들고 그것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학이 흙을 재료로 해서 반도체를 만들어낸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믿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인간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과 일본이 반도체 재료를 가지고 싸우더군요. 그 구조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반도체를 만들고 스마트폰을 만들고 그것을 팔고 싸우다가 때가 되면 손에 있던 것을 놓고 죽어야 하는 존재이지만 땅과 흙은 죽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깨달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자랑할 수 있는 것과 교만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최초의 인간이 아담인데 이것은 אדמה라는 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אדמה는 흙인데 사실 흙먼지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그것으로 만든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시대 안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살지만 언젠가는 모두 이 무대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는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 세대를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듯이 다음 세대도 그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을의 감성과 죽음의 허무를 너무 길게 말한 것 같지만 오늘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말씀은 전도서의 영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28:30 パウロは、まる二年間、自費で借りた家に住み、訪ねて来る人たちをみな迎えて、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28:31 少しもはばかることなく、また妨げることもなく、神の国を宣べ伝え、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を教えた。
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는 폭풍과 같이 치열했던 사도행전의 끝에서 한마디 마무리도 없이 이렇게 끝내 버립니다. 사도행전이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도 되는 겁니까? 어떠한 성취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뜨거운 열정을 부어주고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어떤 기적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감동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사도행전의 마무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울의 죽음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결말이 바울의 장렬한 죽음이라면 납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의 죽음에 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분명히 바울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 죽음은 기념할만큼 장렬한 것이었습니다. 누가가 바울의 죽음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어떤 대단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적도 없었고 죽음도 없었고 환상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누가가 편집을 통해서 의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전도자 바울이라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선교의 현재상황을 말하면서 사도행전을 마친 것은 사도행전의 주체가 바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주체는 바울의 활동이 아니라 성령의 주도적 선교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글은 시작할 때에 핵심주제를 밝혀 놓고 끝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기억해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 8절
8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まれる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ヤの全土、および地の果てに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사도행전의 시작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확산되어 나갔던 유일한 힘이고 이유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위대했던 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사용하여 복음을 위해 섬기게 하기 위해서이지 바울의 믿음이 위대했기 때문에 쓰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만들어 갑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선교의 일에 사용되었던 선교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충실하게 자신을 하나님에게 내어드린 사람입니다. 선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 선교를 사람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없습니다. 순교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목숨을 버리더라도 부정할 수 없었던 가치 즉 복음 때문이지 사람의 신앙이나 열정 때문이 아닙니다.그 목숨을 바친 사람의 의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진정 순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 때문이지 개인의 업적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난주 한국의 주요교단들은 총회를 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실상을 말하면 부끄럽지만 대형교회의 부자세습으로 문제로 오랫동안 진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총회에서 결국 세습을 허용하는 것으로 의결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세습의 문제는 자립이 어려운 교회를 아들이 물려받아 대대로 헌신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막대한 부와 권한이 있어서 그것을 세습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의 부정과 부패를 은닉하려는 것입니다.

분명 그 큰 교회들을 이루어 낸 세대의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적이 있다고 하여도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 “나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그것을 마땅히 교만이라고 지적해야 할 텐데 더 나아가서 지금은 “내 아들이 아니면 안된다” “내 아들만이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회 세습문제입니다. 그런데 교단 전체가 교회를 지킨다는 미명 하에 이것에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담한 사태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제2의 신사참배 결의라고 하더군요. 교회가 세상의 힘 앞에 복종하고 머리를 조아린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얻는 이익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입니다.

세습의 본질은 교회의 사유화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의 것도 아니고 많은 헌금을 한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람이 소유하려 하니 곧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은 한결 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운 교회인데 남을 준다는 말인가….” 무섭지 않습니까? 차리리 수고하고 희생하지 않은 것이 그 영혼에게 좋았을 것입니다. 한 시대의 교회는 열심히 전도했지만 무지한 교회는 선교를 사람의 공로와 업적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28:31 少しもはばかることなく、また妨げることもなく、神の国を宣べ伝え、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を教えた。
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이 꼭 한국교회의 현실을 역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였는데,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하더라.” 가 아닙니까?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 못할 망정 시대의 물건과 사람을 자랑하며 예수 믿는 믿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령이 일곱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을 버린 것으로 책망받았습니다.

2:3 あなたはよく忍耐して、わたしの名のために耐え忍び、疲れたことがなかった。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しかし、あなたには非難す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それで、あなたは、どこから落ちたかを思い出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ないをしなさい。もしそうでなく、悔い改めることをしないならば、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をその置かれた所から取りはずしてしまおう。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는 열심히 해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책망의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곱교회 중에 빌라델피아 교회에는 책망의 말씀없이 칭찬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3:8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ないを知っている。見よ。わたしは、だれも閉じることのできない門を、あなたの前に開いておいた。なぜなら、あなたには少しばかりの力があって、わたしのことばを守り、わたしの名を否まなかったからである。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적은 능력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아서 문을 열어두셨다 했습니다.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교의 성패는 누가 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하는가가입니다. 사도행전은 마치 에베소와 빌라델비아의 교훈을 알고 있는 듯이 사람을 숨기고 일상의 작은 성실과 순종을 통해 성령이 하시는 선교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 기록을 마치고 있습니다. 셋방 (自費で借りた家)을 강조한 것도 가난한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전도비용을 도왔던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립보는 바울의 선교활동을 위해 헌금을 했고 그 돈으로 얻은 셋방은 좁았고 바울은 갇혀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열악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말들은 이런 것입니다. 셋집, 오는 사람, 영접하다, 담대하다, 전파하다, 가르치다, 금하지 않다…입니다. 바울의 셋집은 작지만 복음의 거점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람을 영접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최선으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문은 열려 있고 작은 셋방에 적은 사람이 모였지만 로마제국은 그 작은 집에서 복음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선교를 통해 로마가 열리고 팍스로마나(Pax Romana) , 로마가 식민지배를 하기 위해 만든 길을 통해 전세계에 평화와 구원의 복음을 운반되었습니다. 바울은 한 시대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그 선교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대와 함께 사도 바울도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뀌고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시대를 살다가 가야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기적이나 환상이나 영웅이 아니고 작지만 성실한 일상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교의 실천적 계승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여전히 있는 한 선교는 다시 반복됩니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 있지만 시대가 바뀔 때마다 각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의 후배들은 일어났고 복음은 그 시대를 선교했습니다. 대단한 기적이 아니어도 순교가 아니어도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진실한 선교의 모습으로 28장을 마치고 우리에게 사도행전 29장을 이어서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가 로마의 작은 셋방이 되고 성도는 선한 믿음의 등장인물들이 되어서 사도행전 29장을 써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 책 한 권을 더할 수 있다면 사도행전 후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사실 바울은 사도행전 이후에도 많은 고생을 합니다. 세계사는 사도행전이 끝나는 시점부터 더욱 험난해집니다.

사도행전 본문 강해설교는 오늘로 끝나지만 사도행전 이후에 대해서 조금 더 설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현재의 우리의 믿음과 선교로 연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0월에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지 않는 사도바울의 이후의 선교와 순교, 그리고 2천년을 이어온 선교의 여정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