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1月3日 主日礼拝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로마서13:14
설교 조용길 목사
11월에 들었습니다. 이제 추워질 텐데 곧 외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난번 설교에서도 바울의 외투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디모데에게 자기의 옷을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바울이 쓴 로마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골로새서, 갈라디아서를 읽고 있으면 바울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옷을 입으라는 말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바울은 우리에게 옷 입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오늘은 우리가 입어야 하는 옷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옷은 어떤 옷입니까? 최초의 옷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옷을 입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자신들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처음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처음엔 무화과 나뭇잎이었지만 나뭇잎이라는 것은 꺾으면 곧 시들어 버리지 않습니까? 나뭇잎이 시들면 돌돌돌 말립니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것을 가려줄만 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난처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옷을 지어서 입혀 주셨습니다.-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이 직접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그것이 최초의 가죽 의류입니다. 그런데 옷을 만드는 사건만 처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무슨 일이 최초로 일어났습니까? 짐승이 죽었습니다. 짐승이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짐승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최초의 사건입니다. 약속을 어기고 죄를 알아버린 인간에게 하나님은 진노했고 그래서 처음의 약속대로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약속대로입니다. 계약한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면 반드시 지키셔야 하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기도 했습니다. 하박국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이것은 대단히 탁월한 영성의 기도입니다. 하박국은 부흥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신속한 회복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 앞에서 진노받아 마땅한 자신의 실존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면목이 있어야지요. 그 상황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땅히 진노가 임해야 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그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마땅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아무런 면목이 없기 때문에 ‘겸손한 기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비를 구하고 있는 ‘담대한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자비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임할 때 자신의 실존을 망각하고 마음을 높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체험했던 그리고 체험하고있고 앞으로도 체험할 은혜는 우리에게 응분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어서 자신의 어떠한 행위의 원인으로 초래될 수 있는 결과가 아닙니다.우리가 이것을 기억하고 살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실력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해져서 망합니다. 경건한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 그것을 다시 말하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죽옷 이야기를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원시복음은 최초의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복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의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복음이 계시되고 있고 복음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그것이 복음인지 아닌지 한번 공감해봅시다. 이미 죄를 알아버린 인간,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에게는 많은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그렇습니다.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합니다.
진노는 하나님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더 많이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정당하지만 인간의 분노는 정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분노합니다. 인간의 분노는 공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기심과 자기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분노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화가 나 있었을 것이고 하와는 아담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뱀에게도 화가 나 있었을 것이고 이 모든 복잡한 환경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도 분노해 있습니다. 그 분노는 지금도 가는 곳 마다 들립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고, 왜 그것을 내가 보이는데 두었냐고, 왜 먹지말라고 제한했느냐고, 이 분노를 짜증이라는 말로 바꾸면 우리에게 더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진노해야 마땅하신 하나님은 짜증만 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세워 두고 자비의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역사 안에 복음의 복선이 깔렸습니다. 그 복선은 역사의 클라이막스에서 어떻게 실현됩니까?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그리스도가 되었고 약속대로 온갖 수치를 다 뒤집어 쓰고 모든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클라이막스,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양을 잡으셨겠지요. 유혹했던 뱀을 잡아 가죽을 벗겼으면 통쾌했을 텐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깨끗하고 순결한 양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양이 희생되어야 했고 그 양의 가죽으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 양이 그리스도입니다. 나의 죄 가려주는 가죽옷 입혀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은 피를 다 쏟았습니다. 피 흘림은 죄에 대한 진노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그러나 진노하고 있는 중에도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 있습니다.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이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복음이 창세기의 이야기의 시작에 이미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하필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무로 잎으로 옷을 만들었을까요? 성경에서 무화과 나무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만든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율법이지요. 도덕과 윤리이기도 합니다. 온갖 선한 것들입니다. 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 선한 것으로 치부를 가린 것입니다. 분명히 선한 것이고 분명히 가린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그것이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수가 없습니다. 해가 뜨면 돌돌 말리고 부끄러움은 드러날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분명히 선을 행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고 죄가 상쇄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 모인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건전하고 경건하기 때문에 죄를 흉악하고 무서운 것으로 묘사하면 자신의 것으로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다지 무섭고 잔인한 죄는 잘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죄, 잔인한 죄 앞에 설 때 말고, 부끄러움 앞에 설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에게나 부끄러움은 있지 않습니까? 죄가 없는데 왜 부끄러우십니까?
이솝의 이야기에 햇님과 바람 이야기 하시지요? 햇님과 바람이 내기를 했습니다. 외투 입고 가던 남자의 외투를 먼저 벗기면 이기는 내기입니다. 바람이 먼저 나섭니다. 바람을 힘차게 불어서 그 외투를 날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바람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더욱 외투를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람은 남자의 외투를 벗기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햇님 차례입니다. 햇볕은 바람만큼 강하지 않았지만 햇살을 뜨겁게 했습니다. 더워진 남자는 결국 외투를 벗어버렸습니다. 햇님이 이겼습니다. 제가 어릴 적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기분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바람이 거세도 외투를 벗지 않았지만 더우니까 외투를 벗었습니다.
죽이려고 하면 사람은 오히려 더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부끄러우면 죽고 싶어지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죽이려고 하는 것과 죽고 싶은 것, 무엇이 더 무서운 것입니까? 히브리서 4장 12절은 두려우면서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하나님 앞에 서서 부끄러운 줄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입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인간의 수치를 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없는데 누가 스스로 자신을 부끄럽다고 할 것입니까? 기준이 없는데 무엇을 부끄럽다고 말할 것입니까? 그저 사람에게 부끄러워서 자신을 숨길 뿐입니다. 끝까지 사람을 속일 수만 있다면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온갖 범죄를 저질러 놓고 사법적 기술을 동원하여 무죄선고를 받고 나면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만 아시는 자신의 부끄러움이 세상에 숨김없이 드러난다면 그것을 견딜 육체는 없습니다.
왜 회개기도가 어렵습니까? 회개는 숨기고 싶은 그 부끄러움을 기억해 내야하고 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어렵습니다. 저는 생각하건데 아마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지만 일생에 단 한번의 회개도 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믿음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희귀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전도자 혼다 코지(本田弘慈) 목사님이 젊은 시절 신뢰하는 믿음의 동역자와 서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며 고통스럽고 뜨겁게 기도했던 일화를 자주 간증했습니다. 그 회개의 기도가 얼마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든지 2층 방에 있었는데 2층 목조집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용서받고 가려주지 못하면 죽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 부끄러움에서부터 구원받아야겠지요.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좀 더 기다리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았으면 오늘 다시 그 구원의 방도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자비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부끄러운 우리 몸에 옷을 입혀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좋은 옷도 있고 따뜻한 옷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는 옷은 없습니다. 양가죽을 입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 죄를 진 어린 양 (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小羊) 주 예수로 옷 입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수치를 가려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할로윈데이가 10월31일 10월의 마지막 밤의 축제이지요. 어느새 할로윈데이가 축제 문제로 많이 보급된 것 같습니다. 전세계 할로원 축제 중에 동경이 가장 활발하다고 합니다. 할로윈 데이는 가장합니다.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합니다. 할로윈데이의 사회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도적 사회 안에서 속박된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벗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젊은이들은 자극적이면 좋은 줄 알고 귀신으로도 옷 입고 악마로도 옷 입습니다. 피투성이의 온갖 엽기적인 옷을 입습니다. 그것이 즐거운가 봅니다.
원래 10월의 마지막 날은 종교개혁기념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입을 옷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풀어놓았습니다.-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하나님께 선택받고 사랑받는 자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형제에 대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관용을 위한 인내를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마귀사탄이 할로윈데이에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한다고 해도 이런 것을 따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은 이석재 선생님이 저에게 읽으라고 빌려준 책인데 아직 못 돌려줬습니다. 이 책 저자 야기 쥬키지(八木 重吉)의 용서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사역(私訳)이라 번역이 어색해서 죄송합니다.
「ゆるし」 「용서」
八木重吉 야기 쥬키지
神のごとく 赦したい
人が投げる 憎しみを
胸に暖め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싶어라
사람에게 던지려던 미움을
내 가슴에 녹여서
花のように なったならば
神の前に ささげたい
꽃과 같이 되면
그때 하나님 앞에 드리리
미움을 마음에 품어서 용서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인류 최대의 용서,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끝으로 바울의 “옷 입으라” 하는 권면 한가지를 더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올 크리스마스에 세례 받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분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입니다. 이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에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주는 세례식을 준비합시다. 이전의 옷은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는 가을이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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