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1月17日
「요단강의 열 두 돌」
여호수아4:1‐18
설교 조용길 목사
지난주 여호수아서에서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단강에 도착했을 때 강은 홍수가 나서 범람하고 있던 우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발을 요단강에 들여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합리성으로 보면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요단강 물이 무서운 기세로 언덕을 범람하며 흘러가고 있는데 그 강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선발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어깨에 짊어진 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균형잡기가 힘듭니다. 강물에 휩쓸려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재미있는 성경이야기로 들을 지 모르지만 요단강 도하는 역사적 사실이었고 제사장들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그 강에서 떠내려가지 않고 버텨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언약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인하고자 하신 것은 강을 건널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용기였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그 믿음을 실행했을 때, 즉 제사장들이 흐르는 급류 안으로 발을 집어 넣고 섰을 때 요단강 물은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리더들의 그 믿음을 보신 후에 요단강 물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뒤따라오던 백성들은 강물이 멈춘 뒤에 요단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당시 가나안에 들어가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는 남녀노소를 다해서 200만명 가량이었습니다. 200만명이 걸어서 다 건널 때까지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한 가운데에 그대로 서있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어쩌면 그 이상 걸리지 않았겠습니까? 백성들은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넜고 제사장들만 유일하게 발이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발이 젖은 채로 하루 종일 강 한가운데 서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성들이 다 건너간 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해서 그제서야 제사장들을 요단강 서편 가나안 땅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순종으로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했습니다. 이 믿음의 기적으로 이스라엘은 요단강 동쪽에서 서쪽으로 무사히 이동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과제는 너무나 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저는 여호수아서의 요단강 도하를 읽으면서 여호수아의 리더십과 결단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에서는 사실 더 특별히 조명되어야 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헌신입니다. 보십시오. 건너기에 불가능한 강, 그 무서운 요단강 안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또한 그 많은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동안 그 길 위에서 백성을 지켜낸 사람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도하를 확인하고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아 제일 마지막에 요단강에서 빠져나온 사람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대단한 헌신자입니다. 어떤 사람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이 아닙니까. 그것이 신약성경의 정리이고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누구나 다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그것을 이룬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커튼이 찢어졌습니다. 문이 개방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지성소에 이젠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예수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에 서있던 제사장들은 마치 왕같은 제사장들 같습니다. 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제사장은 예배자를 사랑합니다. 요단강에 선 제사장들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종교적으로 특수한 임무를 받은 사람만이 제사장이 아닙니다. 예배공동체를 위해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흐르는 강물 안으로 먼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영화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이미 오래된 영화이지만 멜 깁슨이 주연했던 위 워 솔져스(We Were Soldiers)라는 영화입니다. 일본에서는 Once and Forever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데 할 무어라는 미군 중령이 부대를 이끌고 월남전 출전합니다. 영화에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부하들과 그 가족들에게 했던 연설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제 전투를 하러 떠납니다. 나는 제군들을 살아서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내용들만은 맹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투를 하러 갔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전쟁터에 도착할 것이고 가장 나중에 그곳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제군들이 생존해 있던지 전사했던지 간에 단 한 명도 그곳에 남겨놓고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So help me God” 라고 맹세합니다.
군대는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멜 깁슨의 부대가 철수하는 날, 자신이 가장 마지막에 헬기에 오릅니다. 땅에 딛고 있던 남은 왼발을 떼고 헬기에 오르던 신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멜깁슨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요단강에서 마지막 발을 떼고 가나안 땅에 올라오는 제사장들의 발걸음이 이 지휘관의 책임감과 닮았습니다.
오늘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불가능은 가능해지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또 한번의 명령을 하십니다. 또 한번 백성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 씩 열 두 사람을 선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차출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는가 하면 제사장들이 서있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서 돌 열 두개를 골라서 그것을 어깨에 메고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밤부터 백성들이 유숙할 곳에 가져다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건너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건넌 후에는 그 강의 돌을 주워 오기 위해 다시 강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 돌을 들고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역사에 기록하고 공동체가 기념하고 그 은혜를 삶속에서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훗날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요단강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던 하나님의 기적을 증거해주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명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명령의 목적은 공동체가 받은 은혜라는 역사의식과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차세대 교육의 중요성입니다. 여호수아는 열두명의 선발된 사람들과 함께 강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스스로 12개 바위를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각각 하나씩 돌을 지고 나와서 길갈에 칠 캠프에 기념비를 만들라고 하신 것인데 여호수아는 그것과 별도로 요단강 안에도 돌을 쌓아 기념비를 만들었습니다.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은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역사의식이 없는데 다가 집단적으로 이기적이기까지 한 공동체는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세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록하지도 않고 기념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오직 애굽의 노예시절에 먹던 고기만을 기억합니다. 그저 먹고 쉬고 잘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노예로 돌아가자고 했던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싶었던 것이지요. 경제는 우리 삶을 둘러싼 중요한 것이지만 경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조금의 역사의식이라도 있었다면 고기타령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대대로 노예로 살면서 고기 먹는 것이 기뻐할 일입니까?
“하나님이 강물을 말려 주셨기 때문에 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강 안에 있어야 할 저 돌이 우리 앞에 서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저 안에 들어갔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수 때 저 강을 걸어서 건넜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강물을 말리시고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기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절망의 자리에서 체험했던 하나님의 구원,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기념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들어와서 요단강을 건너온 것으로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정복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을 치루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에것으로 기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강을 건너게 한 하나님이 생색내기 위해서 돌을 쌓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기억이 있어야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기억이 있어야만 앞으로의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략의 싸움도 아니고 군비의 싸움도 아니고 투력의 싸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지 신뢰하지 못 하는가의 싸움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 베이스캠프를 칩니다. 이제 전쟁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전쟁은 앞으로도 7년이 걸립니다. 그 동안 길갈은 베이스 캠프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우는 모든 전쟁은 길갈에서 출발하고 길갈로 복귀합니다. 상대가 강해서 두려워질 때마다, 그리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어 질 때마다 출정과 복귀의 때에 이 돌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길갈에 돌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 때의 사기진작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영적 위기는 언제 찾아옵니까? 살만 할 때 찾아오지 않습니까.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높아졌다고 생각하고 가질만큼 가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높아지고 목이 곧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노심초사 우리에게 가르치고 당부하고 강조하고 반복하십니다. 그것이 죽을 병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지 않을 방법은 죽을 목숨 살려 주신 은혜를 매일 기억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리더십교체를 잘 해낸 것은 여호수아가 잘 해서가 아닙니다.
4:14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같이 하였더라
리더십이 바뀔 때 그 혼란을 걱정하신 하나님이 특별하신 은혜로 개입해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인정받게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여호수아가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끌어 가겠지만 모세는 여전히 그리운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를 사랑했던 모세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떠났지 않습니까. 그 모세의 글을 다시 꺼내서 읽어봅시다.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모세가 살아서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 날 때 신명기 8장 전체를 꼭 읽어보십시오. 하루만 하나님의 지켜 주심이 없으면 밤새 얼어 죽을 수밖에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줄기차게 배신하고, 당장 적군의 칼이 날라오는 전쟁터에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던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안전해지고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면 하나님을 잊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기억하여 기념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면 다음세대는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 아니 다음 세대까지 가기 전에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하나님을 부정하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목을 졸라서 부르짖을 때만 조금씩 주신다면 아마 우리는 교만해질 틈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하나님을 구하고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강아지에게나 하는 일입니다. 강아지에게는 그렇게 해서 더 충성하고 재롱부리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악한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잡고서 마구 부려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잡고 우리를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에 빠져서 하나님 은혜의 기억상실에 빠져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안 주셔도 되지만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시고 싶으니까 주십니다. 그래서 또 주시면서 당부합니다. “꼭 기억해라. 내가 준 것이지 네가 한 것이 아니다. 교만하면 망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와 명령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괴로웠던 것, 무서웠던 것은 잘 기억합니다. 늘 트라우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늘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당한 일, 억울한 일은 잘 기억합니다. 그런데 살려주셨던 기억, 구원받았던 기억, 은혜 받았던 기억, 감사의 기억은 왜 하지 않고 사는 것일까요.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뒤집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혹시 요단강을 건넜는지 못 건넜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광야의 끝자락 모압 평지에 서 계십니까? 아니면 가나안에 들어와 계십니까? 200만명의 백성들 중에는 짐을 들고 아이들 손을 붙잡고 뒤에서 등을 밀리고 앞 사람 뒤통수만 바라보고 발걸음만 따라 강을 건넌 사람은 없겠습니까? 아마 있었을 겁니다. 두리번거리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앞뒤로 좌우로 치이면 강을 건너는지 바다를 건너는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들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마음의 길갈에 돌을 놓아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고통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약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와서 마음에 열 두 돌을 세우고 기억하십시오.
오늘이 추수감사예배입니다. 일년에 한번 이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를 읽어내고 그것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기념하자는 이유일 것입니다. 길갈에 돌을 세우는 것도 감사를 기억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자 요단강 물은 다시 흐르고 범람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 신분을 바꾸어 주신 것이 요단강 사건입니다. 고기가 그립다고 해서 다시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고기를 먹이는 것은 일을 시키고 일하다가 죽으면 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품인 가나안에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에 캠프를 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5장 이후에 유월절을 기념하고 할례를 행합니다. 홍해를 가르고 나오기 전에 출애굽하게 해 주신 결정적 사건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을 경험하고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신 첫 사건이 할례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여 축제를 열었던 것입니다. 길갈에 돌을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고 유월절을 기쁨의 축제로 드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감정이나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식이 없으면 감사는 사라집니다. 현실은 불평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감사를 찾아 기억할 장치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머지않아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가 창립30주년이 됩니다. 교회 역사를 정리하여서 30주년 기념집을 만듭시다. 많은 교회들이 30주년에 기념집을 만들지만 저는 사실 그럴 만한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료도 기록도 부족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든 하나님 앞에 숨길 것도 포장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 30년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 광야시간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도와주신 것을 기억하여 길갈에 열 두 돌을 쌓는 것처럼 우리의 30주년 기념집을 만듭니다. 믿음과 헌신을 사람 앞에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공동체를 위한 믿음과 헌신과 용기는 공동체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합니다. 30주년 기념집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발행하도록 합시다.
설교를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그전에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식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18년 전 2001년 8월14일 제 생일날에 코스타 재팬이라는 집회에 가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유학온지 2년째, 생일이었지만 아무도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날 예수님을 만났고 그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 22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는 12월22일이 크리스마스 예배이고 그날도 이곳 고향의 집에서 합동으로 드리게 됩니다. 그날에 세례를 받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분도 계시고 고향의 집의 어르신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다시 18년전에 세례 받던 그날의 은혜의 기억으로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분들은 이제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 은혜를 일생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호적에 입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가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기록하고 그것을 기념하는 세례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We Were Soldiers 영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영화의 일본 개봉 제목이 Once and Forever 입니다. 제가 세례 던 그해 겨울에 본 영화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는 더 잘 어울리는 제목 같습니다. 요단강도 세례도 딱 한번입니다. 에베소서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요단강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에서 다시 노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추수감사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기록해 나가는 공동체가 됩시다. 이 가을에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풍성한 은혜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