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年1月12日「길갈의 할례」여호수아 5:1-9

새해 들어 두번째 주일에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작년 11월 추수감사예배를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를 멈추고 어드벤트와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를 지나왔습니다. 여호수아 전체 강해설교를 할 생각으로 여호수아 설교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조금 더 여호수아를 읽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것을 확인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지난 연말부터 시작한 새 예배당 구입과 교회 이전에 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과 도전을 요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시고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것에 대한 순종이 필요했습니다. 그 믿음의 도전과 순종 사이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읽었듯이 그것이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력이라고 하지만 백성이 믿음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면 생명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요단강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선발된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백성 중에 제사장들은 먼저 일어나 언약궤를 메고 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덮칠 듯이 밀려오는 강에 발을 집어 넣어야 했습니다. 그 순종의 순간에 믿음은 요단강을 이겼습니다. 물은 그쳤고 강바닥은 곧 말랐습니다. 백성들은 마른 땅을 걸어서 그 강을 건넜습니다.

발이 젖은 것은 제사장들 뿐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발이 젖은 채로 언약궤를 메고 하루 종일 그 강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과 가축과 재산이 다 강을 건넜습니다. 그 후에도 제사장들은 강바닥에 서 있었고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올라오라고 했을 때 비로소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다시 강 안으로 들어가 열 두돌을 가져나오게 했고 그것으로 길갈에 기념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길갈은 정복전쟁을 위한 본부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두려울 때에도 지칠 때에도 길갈의 돌을 보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십시오. 그것을 기억할 때마다 자신감이 생길 것입니다. 은혜를 바라보지 않고 현실과 상황을 바라보면 늘 걱정과 불안 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은혜 안에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편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가나안 거민들입니다. 요단강 서쪽의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말려 버리시고 그들을 건너오게 하셨음을 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녹았다고 표현했고 정신을 잃었다라고 말합니다. 혼비백산한 것 같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과 강력했던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마저도 당했다는 소문을 이미 전해들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위기를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기억을 되살려 보야야 겠습니다. 처음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의 정탐꾼 들이야말로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메뚜기같은 존재라고 두려워했고 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통곡했습니다. 가나안은 거인들이고 용맹스러운 용사들이었고 이스라엘은 약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역전되어 가나안 사람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힘을 측정하고 서열화해서 등급을 나누고 삽니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하고 실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그 원인을 물어보면 ‘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들이 겸손한 척 하는 대답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솔직한 것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들였던 노력을 부정하거나 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운’이라는 말은 세상의 질서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은사를 주시고 기회와 때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도우심을 경험하게 하셔서 실력과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만능천재가 되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가 때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서 이제 가나안이 두려워할 만큼 힘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힘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운이라고 말하겠지만 믿음은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내게 주신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전장의 북소리는 웅장하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진격해서 땅을 취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서 강한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기가 충천한 백성들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적들을 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타이밍에 전혀 다른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그 때’라 함은 적들이 두려워 떨고 있어서 적을 치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할례는 남성의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내는 유대인의 정결의식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태어난 지 8일 만에 양피 끝을 자르는 예식을 치르는 데 이것이 할례입니다. 교회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지만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례는 할례와 유월절입니다. 할례는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광야의 노정에서 할례를 받을 수 없어 40년동안 할례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지금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본문의 당시에는 날카로운 칼이 없었으니 부싯돌을 갈아서 그것을 칼로 하여서 마취없이 생살을 잘라야 했습니다. 상처는 아물겠지만 할례를 받고 나면 전투력은 상실합니다. 전쟁은 둘째 치고 당분간 걷기도 힘들어집니다. 상처가 아물고 회복되려면 적어도 2주는 걸릴 것입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세겜이 디나를 짝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이스라엘을 찾아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디나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침착하게 그것을 듣고 그렇다면 세겜이 이스라엘의 사위 답게 할례를 받으라 그러면 결혼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디나를 며느리 삼으려고 하몰과 그 아들 그리고 그 성읍 사람들 전체가 다 할례를 받게 됩니다. 34장을 읽어보면 할례를 받은지 삼일이 지났는데도 그들이 아파했다고 기록합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파할 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기습하여 그 족속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복수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비열했던 사건입니다. 아무튼 할례 받은 사람은 전투력은 둘째 치고 일상 생활도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적군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무장해제나 다름없는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할례는 정복전쟁이 끝나고 나서 적이 사라지고 긴장상태가 끝나고 나서 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여호수아의 아무런 대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행동만 나옵니다.
5: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는 그 자리에서 이 일을 순종합니다. 만약 이 정보가 가나안 진영에 새어 나가면 세겜 족속들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멸당한 것과 같이 몰살당한 위기를 맞을 지도 모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 일을 시행하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전쟁이든 정복이든 할례이든 이스라엘에게 닥친 모든 이슈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을 역사 가운데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선언하는 일입니다.

본문에는 할례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애굽의 수치를 가나안 땅에서 벗게 해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5: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400년 노예 생활, 과거 광야 40년 동안의 방황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당당한 백성으로 할례 받은 거룩함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 생활에 쩌들어 있던 노예근성, 패배의식, 정죄의식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생존을 위한 발악, 죄와 불순종의 반복,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잊어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욕망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지난날의 수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정리하게 해주는 거룩한 예식이 할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백성이 전체가 할례를 받은 사건은 역사상 두 번 있습니다. 애굽을 나와서 홍해를 건너 온 후에 모세가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행했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두 번 다 유월절에 행해졌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념이 아닙니까? 구원을 경험한 백성의 구별된 의식이 할례인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게 하신 또 하나의 이유를 생각해보면 힘을 빼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무기의 우수함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청동기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은 철로 같과 창을 만들고 이미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할 때도 칼이 없어 부싯돌로 하지 않았습니까?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이때에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능력의 자신감으로 착각해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생각을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실 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셔서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의 힘을 빼야 합니다. 자동차가 진흙탕에 빠지면 타이어는 시끄러운 소리만 내고 헛돌 뿐입니다. 그런데 타이어 공기압을 빼보면 빠져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는 힘을 빼야 합니다. 공기압이라는 것이 바람아닙니까?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계산과 경험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할례는 무장을 해제하고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할례를 받고 거동도 하지 못하던 백성들이 상처가 아물 때까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위기에 노출된 자신과 가족들을 보면서 그 안전과 장래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도가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육신적 수단을 포기한다는 것, 전술전략이나 무기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신앙의 절대적인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어도 2주간 완전한 운명공동체로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할례는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공동체의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받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 사람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 시간 동안에 마음 안에 어떤 정욕도 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안에 욕심은 사라져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커져야 합니다. 그들은 광야를 돌아다녔지 않습니까? 난생처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고 있는 시간 동안에 성도는 인생을 반추합니다. 광야 생활은 모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꺼내어 기억하고 묵상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감에 들뜬 사람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가만히 앉혀 두시고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을 결코 의식이나 형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길갈의 할례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형식화되어 버린 율법을 다시 가르치면서 “할례는 마음에 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길갈의 할례야말로 몸에 했지만 어느 때보다 마음에 하는 할례였습니다. 내 마음의 욕심을 도려내서 아프고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할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할례를 받았으니 이제 세상의 종된 애굽의 노예생활과 집도 없이 떠돌며 방황하던 부끄러움은 하나님 안에서 끝난다는 선언입니다. 할례를 행해야 하는 시기는 광야의 기간도 아니고 가나안을 정복한 후도 아닙니다.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니 가나안을 정복하기 바로 직전 지금이 할례의 시간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하는 것 그것이 길갈의 할례입니다. 2020년에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는 할 일이 많습니다. 그 중요한 한 해를 시작하면서 각자의 마음에 할례의 시간을 가집시다. 부끄러운 과거를 떠나 보내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반추하고 기념하여 기어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