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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代表的な碩学でイ・オリョンという人物がいる。キリスト教信仰は文化的現象であり、それを信仰するということは迷信に他ならないと公表的に言い続けた人である。成功した学者は、入閣後に長官を務め、韓国社会における知性のアイコンとして通じるようになった。何一つ不自由のなかった先生は、国際弁護士として出生コースを突っ走っていた娘の不幸から人生の転換点を迎えるようになる。孫の障がいによる娘の苦しみとその娘の視力喪失、そればかりか孫の死と娘の死、、、娘の不幸な人生を側で見ながら何もやってあげられない無能な父が自分自身であるという絶望を体験する。彼は苦しみの中で祈っていた娘、死を目前に誰かに仕えていた娘の人生を見ながら、「お前が見た光を私にも見せておくれ」と泣いた。

神様

あなたに一束の花ですら捧げたことがないので私を覚えていないでしょう

しかし神様

すべての人が眠っている夜にあなたの低い息の音が聞こえます

とても寂しい時にはあなたの前に跪いて祈ることもあります

神様

どうやってあの多くの星を造ったのですか、そしてはじめに海に魚を泳がせた時、あの銀色に輝く羽を造って鳥たちが一斉に飛び上がる時、神様も拍手をしたのですか

ああ!実に神様

光よあれと言われ、そこに光があっとは

人々は今詩を書くために足爪のような鈍い心を裂き、鼻血のように濃い涙を流しています

砂粒みたいな星でも良いので私にそれを造る力をください

いいえ空の星ではなく真っ暗な心の中の夜空に光る蛍の一筋の光で十分です

もう少し近くに行ってもいいですか

あなたの足の先を隠す神聖な裾を汚れた手で少し触ってもいいですか

それによってあの無知な人たちの心の中をオルガンのように響かせる美しい一行の詩を書くことを許してくださいますか

神様

-ある無神論者の祈り- イ・オリョン

この詩は彼がクリスチャンになる前に綴った詩である。こうやって神様を求める小さな歌が「ある無神論者の祈り2」では変わる。「あなたを呼ぶ前は何の声も聞こえませんでした。あなたを呼ぶ前は何の姿も見えませんでした。しかし今は違います。うっすらと見えて、遠くから聞こえます。」彼は神様が聞こえ見え始めたのだ。一生涯無神論者として生きてきた学者は73歳でイエスを信じた。彼は洗礼を受ける時「一人バタバタと生きてきた自分が哀れだ」と告白した。

ある講義で自分の人生はイエスを信じる前まではすべてが順調だったと言ったそうだ。しかしイエスが自分の人生に登場してからは患難と苦しみと喪失が絶えなかったという。実際にそうだった。しかし彼はその人生でイエスに出会ったと言った。それも事実だ。消え去る欲望のために喉がかれるまで求め、それを恵みだと騙し、それを信仰だと信じ込む世の中にあって、学者は匕首(あいくち)のような真理を突き刺したのだ。

イエスを信じた理由で殆どの読者は離れていき、非難と中傷を受けたが、彼は自分の神様を大胆に語った。彼は孫と娘を天に先に送り、彼も癌を患った。しかし今彼の神様はもっと鮮明に彼に近づいてこられ、もっと大きく語りかけられる。彼は言う。自分の宗教は今始まっているのだと。

人々は彼の娘の目が癒されたことで神様を信じたのだと言う。しかし彼はそうではないと言う。神様に出会ったのは癒しという奇跡のためではない。癒しと奇跡は今も起こるが、それが信仰ではない。そこから神様と語り合うことで信仰が始まるのだ。

私たちの教会は主日の夜にCBSIという聖書教材を使っている。全巻を学ぶには20年がかかる。もともと英語だった教材を韓国語に翻訳した人はソウル大学社会学科名誉教授のクォン・テファン長老だ。アルツハイマーを患いながら全巻を翻訳した。私は彼の家の書斎で彼と初めて出会った。不便な手でキーボードを打ちながら新・旧約の教材を翻訳していた。翻訳というのは読んで理解したという意味である。その作業が終わった時、彼は光の中に佇むかのように平和に見えた。書き終えた喜びではなく、光に出会った喜びであった。

彼の妻は、家を訪れる人たちに対して、夫が退職後に体は不自由だけど聖書教材の翻訳ができたことは本当に良かったと話していた。その言葉を聞いたノ教授は、自分の人生で一度も経験したことがない、最も幸せで意味のあることをしているんだから、可哀想だとか、暇つぶしができて良かったとか、そんなことは言わないでくれと言った。もともと彼は妻の信仰に倣っていた人だった。しかし彼は神様のことばを翻訳しながら聖書にある光を見たのだ。小さな部屋の中で不便な手を使いながら神様のことばを翻訳していくうちに、光なる神様のことばと語り合い出したのだ。

誰かの恵みの話を伝えようとこれを書いたのではない。誰かの神様ではない、私の神様を話すためである。誰かの証の偉大さに圧倒される必要はない。彼らもみな誰かの助けによって外に出てきた人たちだからだ。ただ彼らは家の奥の自分の部屋で神様に出会った人たちである。神様の恵みは私たちにも溢れているが、私たちがそれを発見できずにいるだけなのだ。私の人生を通してあらわれる私の神様を証しできずにいるだけなのだ。神様の恵みは大きくしていくのではなく、その大きさを発見することである。告白が大きくなればなるほど、私を愛している神様の愛と恵みの証が日に日に大きくなるのだ。

自分が出会った神様ほど大きい神様はいない。誰かの不治の病を癒す神様よりも、私の指に刺さったトゲを抜いてくれる神様を私たちはもっと体験せざるを得ないからである。神様を語るには、どこから語るべきだろうか。聖書をどれほど知れば伝道ができるだろうか。誰かの神様ではない、私の神様を発見しよう。そしてそれを神様に語る時、それは救いに相応しい信仰の告白となり、それを誰かに話す時、それは宣教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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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 석학으로 이어령 교수라는 분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문화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신앙한다는 것은 미신과 다름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던 사람이다. 성공한 학자는 입각하여 장관을 지냈고 한국사회에서 지성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부러울 것 없는 선생은 국제변호사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딸의 불행에서 삶의 변곡점을 만난다. 손자의 장애로 인한 딸의 고통과 딸의 시력상실, 이어진 손자의 죽음, 그리고 딸의 죽음…딸의 불행한 인생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어버지인 자신이라는 절망을 체험한다. 그는 고통 속에서 기도하던 딸,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섬기던 딸의 삶을 보면서 “네가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고 울었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 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셨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날아 오를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 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 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 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 더 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중에서- 이어령

이 시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쓴 기도 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작은 읊조림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에서는 바뀐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학자는 73세에 예수를 믿었다. 세례를 받으면서 “혼자 바둥바둥 살아 온 자신이 불쌍하다”고 고백했다.

어떤 강의에서 자신의 삶은 예수믿기 전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고 형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의 삶에 등장한 이후에는 환란과 고통과 상실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그는 그 삶에서 예수를 만났다고 했다. 그것도 사실이다. 사라질 욕심을 위해 목이 터져라 구하고 그것을 은혜라고 속이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속는 세상에서 학자는 비수같은 진리를 내려꽂았다.

예수믿은 이유로 대부분의 독자가 떨어져 나갔고 비난과 조롱을 당했지만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손자와 딸을 하늘 나라에 먼저 보내고 이제 그 자신도 암에 걸렸다. 그러나 그의 하나님은 지금 더 선명하게 그에게 다가오고 더 크게 말씀하신다. 그는 말한다. 자신의 종교는 지금 시작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그가 딸의 시력이 고침받았던 사건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만난 것은 치유라는 기적 때문이 아니다. 치유와 기적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지만 그것이 곧 신앙은 아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해야 신앙은 시작된다.

우리 교회에는 주일저녁에 CBSI라는 성경교재를 사용하고 있다. 전권을 공부하려면 20년이 걸린다. 영어로 된 이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권태환 장로이다.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전권을 번역해냈다. 나는 그분의 집 서재에서 그분을 만났다. 불편한 손으로 키보드를 누르면서 신구약 성경교재를 번역하고 있었다. 번역했다는 말은 곧 읽고 이해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작업이 끝날 때 그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탈고한 기쁨이 아니라 빛을 만난 기쁨이었다.

그의 아내는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남편이 퇴직 후 몸은 아프지만 성경교재번역이라는 소일거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노교수는 말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가장 행복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자신에게 불쌍하다느니 소일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느니 라는 말을 하지마라고 했다. 원래는 그는 아내의 신앙을 따라다니던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면서 성경 안에 있는 빛을 보았다. 작은 방에서 불편한 손으로 키보드를 눌러가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번역할 때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의 은혜의 이야기를 퍼다 나르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남의 축복의 간증의 크기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들도 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나온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도 넘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내 삶을 통해서 나타난 나의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 크심을 발견해가는 것이다. 고백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는 날마다 커질 것이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 만큼 크신 하나님은 없다. 남의 불치병을 고쳐주신 하나님보다 내 손가락에 가시를 빼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더 체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말하려면 어디에서 부터 말해야할까. 성경을 얼마나 알고 나면 전도를 할 수 있을까. 남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을 찾자.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말할 때 구원에 합당한 신앙의 고백이 되고 그것을 사람에게 말할 때 선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