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0~21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3:18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주마가편 (走馬加鞭) 이라고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친다고 했습니다. 똥 밭에 뒹구는 돼지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 채찍을 때리지는 않습니다.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게 되어 있고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일을 시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원래 있던 은사마저 사장될 것이고 일하는 사람은 더 많은 능력과 은사를 받아 멀티 커리어가 될 것입니다. 그것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믿음의 순종에 의한 지혜의 은사는 자신도 모르는 영역을 확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에는 책임지지 않으려고 일을 회피하는 직장인이 많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결국 그들의 능력과 기회는 축소될 것이고 사회와 조직은 그런 사람을 회피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받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지만 믿음이 없는 곳에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 뛰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를 찔러도 은혜가 터집니다. 그러나 운동하지 않고 활동하지 않고 고여버린 복음은 그 시대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이 운동하고 있어야 구원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듣기만 한 복음으로는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상으로 들었던 그 많은 설교는 어디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게 했습니까? 집에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이 없어지면 앉아서 책을 읽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설교가 없어져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기의 지성과 영성으로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설교라는 형태로만 의존하지만 실상 설교를 듣지는 않습니다. 목사라는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되고 설교는 들어보기도 하고 해보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입에 넣고 씹어 먹어 소화하지 않은 것은 하루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믿을 것은 목사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분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어도 자신의 입술로 전해본 복음이 없다면 단언하건데 그는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의 필수요건으로 전도가 포함되는 것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영업 전략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해보면 자신이 복음을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맙고 칭찬하고 싶었던 빌립보 교회에게 더욱 열심히 뛰라고 권면합니다. 교회가 비만이 되고 복음이 박제되고 있는 시대에 바울의 복음을 위한 달음질을 읽고 보니 무책임과 나태를 숨길 수 없어서 부끄럽습니다.

 

18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활동하지 않게 되는 주된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19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19」 복음이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게 하는 주범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성도가 경제적 가치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에 함몰되고 나면 신앙이 설 자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한 사람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님이 계십니다.나도 거기에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