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13:21-30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13:29 어떤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성취될 수는 없었겠습니까? 만약 유다가 거부했다면 하나님의 십자가 계획이 실패하였거나 혹은 싫다는 유다에게 악을 강요하면서 성취하셨겠습니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인류 구속 사역은 성취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도 예정에 관해서 생각했었지만, 예정과 섭리라는 주제는 여전히 깊은 신비입니다. 신비를 대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다만 고민은 구름 위에서 할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리로 내려와서 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칼뱅은 배반과 죽음이 예언되어 있었다고 해도 유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유다가 예언을 이루려고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악한 마음으로 그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 퍼즐의 한 조각이 될지 아직 잘 모릅니다. 인생을 걸어가는 동안에 은사와 기회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에 반응할 수도 있고,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의 의지를 예지하시더라도 예정하시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그렇게 우리의 신앙의 공간을 확보합시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는 이미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식탁의 소금 통은 돈주머니를 든 오른손에 걸려 엎어져 있습니다. 소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빈치는 유다의 배신을 엎어진 소금 통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변절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소금이 없으니 변질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엎어져 버린 소금으로 생각과 믿음이 변질되고 퇴색된 절망을 표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유다의 죄는 전통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해온 배도와 자살입니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신했고 회개 없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정과 의지의 관계만큼이나 우리에게 어려운 또 하나의 주제는 유다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과연 우리에게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정당합니까?

 

니콜라이 게의 유다의 양심 Conscience, Judas 이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배신한 유다가 가졌을 절망의 색채가 진하게 전해집니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에 몰려 죽음을 찾아 헤맵니다. 쏟아져 버린 소금의 후회입니다.

 

유다에게 지옥의 낙인을 찍고 싶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저에게 그런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영역입니다. 유다의 배신이 의지인지 예정인지조차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데 지옥인지 천국인지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배신은 일상에 편만하게 널려 있습니다. 인간의 배신은 끝없습니다. 인간의 배신과 상처를 알기 때문에 십자가를 붙드는 힘은 더 간절합니다.

 

배신과 자살을 어떤 의미로도 미화하거나 용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 성도, 절망을 이기지 못한 죽음 앞에서 침을 뱉는 성도들의 소금 통도 이미 넘어져 있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