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요한복음17:1-5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고전으로 꼽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 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주는 인생 최고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

 

물론 제임스 패커가 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현재의 자리로 가져와서 설명하셨습니다. 영생은 죽음 이후의 시간적 개념이기 이전에 지금 현실 세계에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 이해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출발점은 지금 여기이며 그 시작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주체가 되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의 근거와 통로가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지식의 시작은 관찰일텐데 예수님을 관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관찰 가능한 현실 세계로 오셨고 분석 가능한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아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γινωσκωσιν (기노스코신) 의 시제는 현재와 현재의 계속입니다. 현재의 진행이 계속적이어야 합니다. 지속적인 현재에서 「안다」는 것은 끊임없이 「알아간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알았던 것이 아니고 현재에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하고 알고 있다는 것은 곧 알아 가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코 조직적으로 정리한 문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전인격적 이해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이런 지식을 얻으려면 반드시 경험을 동반해야 하는데 객관적 관찰자의 자세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 안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론화된 지식은 믿음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실제적인 지식이 됩니다.

 

칼빈은 방대한『기독교 강요』의 시작을 이 지식에 대한 통찰로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 수 없다. 」탁월한 이해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에 비교해 보기 전에는 자신의 비참하고 무능한 상태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다 보면 그제서야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자신을 알고 나면 그제서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 모든 질문과 대답이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영생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