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골로새서 3:12~17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전반부의 교리적 내용은 만유의 주재, 그리스도가 모든 것, 우주 만물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즉 기독론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글은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된 성도의 신분에 대해서 말했고, 3장 후반부 오늘 본문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독론에서부터 필연적으로 교회론이 나와야 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곳에 교회가 세워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성도의 윤리적 삶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키워드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용납, 용서, 사랑입니다. 이것의 연결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인격의 정도,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과연 기독론에서 이어지는 교회론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긍휼과 자비와 같은 긍정적인 권면이 나오지만 어떤 서신에서는 부정적 폐단과 죄를 엄격히 금지하는 윤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모든 윤리는 일관적으로 「교회를 위한 윤리」입니다. 인간이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도달해야 하는 성화의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상의 배려과 주의를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용납, 용서, 사랑을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불쌍히 여기고, 자기 자신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아 겸손하고, 싸우지 말고, 온유하게 말하고, 미워도 참고, 받아주고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고, 기어이 사랑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원래의 뜻을 오해한 시대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 없음을 비관하고 자책했습니다. 그러나 그 원래의 목적은 욕망과 죄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성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구성하는 교회를 질서 있게 하기 위한 호소인 것입니다. 바울의 어조는 이런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미워하고 싸우고 서로 욕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밖에 나가서 그런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교회 얼굴이 뭐가 되겠습니까?

 

제가 평소에 추구하는 교회론은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 말씀이 목사와 강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성도들 안에 풍성하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말씀을 나눕니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으로 서로 가르칩니다. 상호효과입니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신비한 무엇인가가 아닙니다. 신령한이라는 말에 집착해서 엉뚱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문맥상 그런 것이 들어올 틈은 없습니다. 자신의 고백이 들어간 찬송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바울의 말을 듣고 실천했다면 말씀과 교육과 찬양이 성도에 의해서 주체적인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