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예수님은 27절에서 또 한 명의 제자를 부르십니다. 레위라 하는 세리입니다. 이 사람은 마태복음을 쓴 마태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이고 레위지파 사람입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읽었듯이 레위지파는 성전의 예배를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태가 세리가 되어 세관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세리는 단순한 세금징수원이 아니라 부정으로 금전으로 취하여 당시 백성들의 원성을 받던 몰염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해야 하는 레위인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으니 잘못되어고 한참 잘못된 시대임이 분명합니다. 누가가 마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레위라고 쓴 것에는 그 사회적 고발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카라바조의 「마태를 부르시는 예수(The Calling of St Matthew, Caravaggio)」 라는 그림을 가지고 수요예배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위의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세관에 나타나셨고 다섯 명의 세리가 앉아 있는데 두 명은 예수님을 보고 있지만 그 방문에 관심없다는 표정이고 두 명은 예수님이 오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 세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그중 가장 젊어 보이는 한 명의 세리는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동전을 세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한가운데 앉은 수염이 긴 사람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면서 자신을 부르시는 것인지를 반문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도 돈에 집중한 사람은 그것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나 마태는 자신을 부르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놀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에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만, 오늘 아침 큐티를 위해 다시 이 그림을 찾아보니 이야기가 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마태라고 생각한 사람의 손가락이 가르키고 있는 위치가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요?」 가 아니고 「얘요?」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카바바조가 절묘하게 남겨둔 예수님의 시선을 확인해 보니 역시 예수님의 시선이 가르키고 있는 것은 수염 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가락도 그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손가락 그리고 수염 난 사람이 가르키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머리를 처박고 돈을 세고 있는 화면의 가장 왼쪽에 있는 젊은 세리인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 들어가 있는 그의 눈빛은 얼마나 돈에 집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누가가 마태를 부르신 사건과 예수님이 오신 것은 병든 자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이라고 말한 것은 각각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태는 여전히 돈을 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날은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때가 아니고 여전히 땅에 머리를 파묻고 살던 그때입니다. 병든 자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때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1,32」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말한 우리의 구원의 시점을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https://www.youtube.com/watch?v=m18zQxyY2x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