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를 똑바로 쳐다보기에는 어쩐지 미안해지는 봄이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아 무안해하는 꽃을 뒤로하고 동북을 향해 달렸다. 후쿠시마의 들에는 물로 뒤덮였던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사쿠라 대신 방사능 수치를 알리는 전광판이 잊을만하면 나타났다.
봄 햇살은 더없이 황홀했다. 쏟아져 들어온 햇살의 평화 위에 9년 전 평화롭게 빨래를 널다가 휩쓸려간 사람들의 지르지 못한 비명이 침묵이 되어 흘렀다. 그간 함께 했던 신학생을 그 후쿠시마의 들판에 내려놓았다. 하늘에는 살빛 낮달이 걸려 있었고 우리가 가면 곧 바람이 일 것만 같아 떠나오지 못하고 몇 번이고 뜸을 들였다.
동경에는 코로나라는 쓰나미가 덮쳐왔다. 끊임없이 엄습하는 재앙에 익숙해질까 봐 두려워진다. 건강하던 사람이 일주일 만에 죽었다는데, 그날에 빨래를 널던 사람들처럼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떠났을 것이다.
사람들이 죽었던 곳에 새내기 사역자를 내려놓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서남쪽을 향해 달렸다. 화사하던 햇살은 불덩이가 되어 츠쿠바산 위에 걸려있었다.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격리된 인생들이 소멸하듯 사라져 간다. 죽음이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죽음은 원래 항상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애써 부정하고 살았을 뿐이다.
자신감이라는 것을 모조리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마스크를 쓰는 일과 손을 씻는 일 외에는 없다. 마스크가 생각날 때마다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적어도 마스크를 믿는 정도의 믿음은 하나님에게도 드려야 할 테니까.
마음이 황급해졌는데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준비를 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서는 준비를 하는 것일까?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입장료 같은 헌금을 내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갔던 일들은 과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었을까? 나는 그 수많은 날들에 제일 먼저 교회로 갔고 또 설교를 했고 제일 나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그래서 더 두렵다.
키르케고르가 단독자라는 말을 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 그것은 고독한 일이다.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영혼이 고독한 영혼의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필연적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위험한 곳이 되었다. 모일 수 없는 곳, 모여서는 안 되는 곳이 되었다. 이 어이없는 반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기에 모였다고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니라는 매서운 음성일까?
격리된 시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아무에게도 무엇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구원의 자비는 교리와 의식에 있지 않고 단독자의 인격과 참회 안에서만 일어난다.
신학생은 단독자로 후쿠시마에 섰고 예배자들은 단독자로 자신의 공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예배가 해체되는 시대에 하나님은 예배를 강화하시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