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1~9
살전02:0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살전02:0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살전02:0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살전02:0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살전02:0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살전02:0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살전02:0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02:0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살전02:0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데살로니가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에게해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넘어간 후 빌립보 다음으로 전도했던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유난히 광적인 박해를 했습니다. 그저 쫓아낸 것이 아니라 쫓아다니면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그 박해를 피해서 도망가야 했고 베뢰아를 거쳐 황급히 배를 타고 아덴(아테네)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마케도니아에는 디모데와 실라를 남겨두었는데 이후 디모데와 실라가 마케도니야에서 내려와 고린도에 있던 바울과 합류하면서 바울에게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전했고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에게 써 보낸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복음이라는 말이 거듭해서 등장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형제들이 이미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성취된 복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하면서 받은 고난의 신학적 해명이기도 했습니다. 선교의 실존적 고난은 그리스도가 받은 십자가의 고난의 진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교에 투영된 복음의 진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로 마땅히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교사의 삶으로 그 권리와 영광을 취하지 않았고(6절) 유모가 자녀를 양육함과 같이 그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살았고(7절)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 주려고 하였고(8절)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자비량으로 재정을 충당한 것(9절)도 바울 자신의 자랑이 아니고 복음의 진정성을 역설하는 복음의 자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의 순도가 높은 것이라면 세상은 우리와 우리가 가진 복음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것이 안타깝고 억울할 수는 있겠으나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고난 없는 선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 선교에서 고난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선교가 전한 복음의 순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는 고난의 선교를 통해서 그 진정성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하는 복음은 변하지 않되 전하는 사람의 삶의 진정성에 따라 전해지기도 하고 거절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