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데살로니가전서 5:1~11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하라

 

그날은 도적같이 온다고 하였으므로 재림의 때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때를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사람들은 끝없이 누가 언제 어디서라는 말을 믿고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본문에 그러므로가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6 」이고 또 하나는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하라 11」입니다.

 

종말은 끝나는 것이지만 종말론적 신앙은 끝이 있음을 아는 겸손을 말합니다. 아마도 그릇된 종말론으로 삶의 질서가 무너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제 본문 말미에 성실히 일하여 그 소득으로 단정한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를 알아내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고 내일 오실 것처럼 오늘을 사는 현실적 영성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별한 가난한 구두공 마르틴입니다. 그는 작은 가게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구두를 고칩니다. 어느 날 그런 마르틴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일 거리로 가겠노라고… 마르틴은 하나님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종일 창 너머의 길을 내다보았습니다.

 

거리에 늙은 스테파니치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초대해서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습니다. 잠시 후 얇은 옷을 입은 가난한 엄마가 아기를 안고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빵과 수프를 대접하고 자신의 외투와 돈을 내어줍니다. 언제쯤 하나님이 오시려나 마르틴이 다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어떤 아이가 사과 파는 할머니의 사과를 훔쳐 달아나려다가 붙잡혀 거리에 소란이 일었습니다. 마르틴은 나가서 아이의 사과 값을 대신 물어주고 아이가 할머니에게 사과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렸던 하나님은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마르틴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하나님은 늙은 스테파니치로 그리고 가난한 아기의 엄마로, 배고픈 아이로 거리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데살로니가서가 요구하는 종말론적 신앙도 때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삶의 자리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깨어 근신하며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내일의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은 오늘을 믿음의 가치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