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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19~28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데살로니가전서 5:19~28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5: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5: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지난 시간 읽었던 데살로니가서의 종말론적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과 화목을 이루어 가는 것, 그리고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워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23절은 그것을 결론적으로 제시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3」 따라서 데살로니가서가 말하는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윤리성은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삶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을 참고하면 그것은 권위에 대한 인식과 존중, 상호의 화목, 충돌없는 인간관계입니다. 16절 이하에서는 이것을 위한 심도 깊은 영성을 말했는데 다양한 의미에서의 「약한 자들에 대해서 오래 참을 것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귀에 익은 권면이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문장이지만 실천할 수만 있다면 천하무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현실적 영성이라는 문맥 안에서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편지를 마치기까지 이른바 현실적 영성의 권면은 이어지는데 그중에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19절과 20절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19,20 」성령과 예언은 우리 일상에서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여 마치 다른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른바 복음주의와 성령주의의 성령 인식이 대립하고 있고 어떤 이는 성령을 신비로만 인식하고 어떤 이는 이성으로만 인식합니다. 일본은 한국의 경우보다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성령을 신비적으로만 인식하는 사람은 뜬구름 잡듯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지금도 일하시는 성령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의 지적체계 안에 하나님을 구겨 넣으려고 합니다. 균형을 가지고 싶은 분에게는 그 주제에 탁월한 책 제임스 패커의 『성령의 아는 지식』을 추천합니다. 제임스 패커는 성령님의 활동 목적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은 이것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아침 묵상에 성령론과 은사론을 길게 인용하여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여기서도 문맥을 확인해 본다면 저자의 문학적 의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종말론에서부터 나온 경건이지 윤리학에서 나온 경건이 아닙니다. 윤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하는 성도들의 삶이 윤리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도덕적 의지를 강조하는 율법주의 또는 인본주의로 흘러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말론적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윤리적 삶을 논하다가「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원칙적 기둥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성도들의 오해의 소지를 줄이려는 바울의 노파심이 반영된 문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의 소멸하다 (σβέννυμι 스벤누미)는 불을 끄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언은 미리 알고 말한다는 의미의 예언(予言)이 아니고 맡은 말을 대언한다는 의미의 예언(預言)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것을 따로 떼어 놓지 않고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인간이 성령을 소멸할 수 없지만 귀를 막으면 자신 안에서 성령은 일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끈질기지만 강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없이 신앙은 성숙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고 예언을 멸시치 않는다는 것은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26 」지적으로 영적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귀로 들리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말로 고집스러워질 뿐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멸이고 예언의 멸시입니다. 바울은 모든 형제에게 이것을 읽게 하라고 당부하고 편지를 마칩니다. 에다가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