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로마서 9:1~13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9: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지적하는 동시에 구원의 대상 즉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두 이야기를 통해서 허를 찌릅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아들로는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통한 후손만이 약속의 자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택하시고 약속의 후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부부가 약속을 신뢰하지 못했던 불신앙 속에서 잉태했던 자녀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하나님은 형 에서가 아닌 동생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경우이든 야곱의 경우이든 그것이 어떤 행위에 의해 쟁취된 자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말하듯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했습니다. 한 아기는 사랑하고 한 아기는 미워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서를 통해서 에돔민족이 형성되는데 하나님은 에돔을 택하여 구원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택하여 구원사역의 목적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변경됨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은 이스라엘 안에서 성취됩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 안에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교육된 선민의식 안에서 자부심을 가졌을 뿐 그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택하심을 따른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엄밀하게는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에 불의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의식하고 있지 않던 이 문제를 제기하며 묻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바울의 자문자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방식은 항상 치고의 가치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근거는 법률에 근거한 의가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긍휼입니다.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심에 따라 부르신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영적 자녀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구원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이었고 이스라엘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권적인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그 주권적 선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그들의 구원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구원의 조건을 유대인의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대치했습니다. 아니 회복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인을 비난하고 소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 민족이라는 자신의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가능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향한 선교에의 의지를 극대화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면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기도했던 모세와 동일한 심정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애착은 동족으로서의 애잔한 마음이지 유대인으로서의 영적 우월함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이 구원에 문제에 있어서 헬라인을 차별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두신 돌 곧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졌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조건인 예수님이 구원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