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7월23일 로마서2:1-11
롬02:0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02:0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롬02:0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롬02:0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02:0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02:0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롬02:0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02:0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02:0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0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0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2장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데 의외인 것은 1장의 창조 질서를 위반한 가증한 헬라 문화의 죄악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남의 일인 양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로마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읽었을 특히 유대인들은 바울의 우상숭배와 동성애와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질책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돌직구를 날린 것입니다. 너희들은 무엇이 달라서 비판하는가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혼나기 시작한 로마교회의 유대인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우상숭배와 동성애의 죄를 범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믿음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남을 비판했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진노를 자기들 위에 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것을 방어기제 중에서 투사 (projection) 로 분류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 태도,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타인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고 자기 실패의 원인을 전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교회의 윤리적 문제는 비유대인들의 방탕한 헬라 문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로 죄를 버리지도 않고 자존심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감에 차 있고 자기의 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분열하여 두 개로 세 개로 나누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가혹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거울을 보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할 때에는 합리화하고 침묵합니다.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는 회개를 적용하고 남에 대해서 용서를 적용하라고 가르치지만 우리는 청개구리라 뒤집어서 합니다.

 

독일 경건주의의 벵겔은 비판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명확한 지식, 또 하나는 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의 필요성입니다. 명확한 지식이란 감정에 휩싸인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팩트체크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의 비판받을 혐의뿐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지식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사랑에 근거하지 않는 비판은 형제 살인입니다. 사실과 사랑에 근거했을 때 비로소 비판의 필요성이 있는지를 체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의 촉구와 발전적 대안이 없는 비판은 단순히 비난을 위한 것으로 필요성에 부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동성애를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는 죄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반대의 성경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너희들이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로마서 1장의 동성애 반대의 성경적 근거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2장의 비판하지 말라는 성경적 근거 또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장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관심하거나 찬성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역시 프로이트가 말한 투사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입장을 밝힌다면 동성애가 법적 지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그것은 약자와 소수자가의 문제가 아니고 성적 타락과 질서에서의 이탈이 낳은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팩트체크를 해야 합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반기독교적이라든가 동성애 반대 설교하면 목사가 체포된다든가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선동된 가짜뉴스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바울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가 사는 시대의 신앙 윤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답해야 합니다.

 

반대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작고 소극적인 것뿐입니다. 윤리적 정당성이 반대를 통해서 세워질 수 있습니까? 교회가 기독교의 윤리 수호를 위해서 반대라는 방법이 아닌 적극적 실천을 통해서 지키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양심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성적 영역은 과연 안전합니까? 이 반문은 자유주의 신학자의 말이 아니고 좌파의 말도 아니고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말입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죄라고 가르칩니다. 동의합니다. 법제화된다면 반대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혼과 혼전 성관계와 불륜과 범람하는 포르노 매체도 죄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간통죄는 동성애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죄악일 텐데 간통죄 폐지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반대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기독교는 N번방에 대해서는 왜 실력행사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의 대학부, 청년부의 청년들 아니 중고등부의 청소년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은 혼전 순결을 얼마나 지키고 있을까요? 혹시 시대가 변했다고 푸념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어떤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해도 되고 어떤 것은 혐오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목사에 의한 성추행과 성폭행이 하루가 멀게 사건사고로 다루어지는 시대에 교회는 너희들은 무엇이 달라서 비판하고 있느냐라는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노회는 부정과 반칙, 불륜과 성추문을 치리하지 않고 유야무야로 넘어갑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윤리적 정당성이 있어서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간 것일까요?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2:5 이것은 동성애를 한다는 헬라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는 동성애 안 하는 보수적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비난에 집중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벵겔이 말한 명확한 지식이란 나는 거룩하다고 하는 투사적 방어기제를 사용하지 않는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직시하는 것일 겁니다. 그들을 혐오의 눈으로 보는 이상 사랑은 결여되어 있을 것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안에 있는 동성애 옹호를 반대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당연합니다. 그 확산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안에 있는 장애인과 여성 권리,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위한 차별금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옹호해야 하는 실천도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몇 년 전 간통죄가 폐지될 때 그것은 성과 가정의 윤리의 문제였지만 동성애는 정치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윤리의 문제라면 동일하게 반대했어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유튜버들에게 교육받고 있고 그것으로 설교하고 있는 비참한 시대입니다. 비윤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진영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여기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2:11 하나님은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속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