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마가복음 14:22~31
14: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14: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4: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찌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코스타라는 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데 몇 년 후 신앙과 헌신의 주소를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다시 코스타에 참가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집회를 인도했던 강사는 선교를 위해 헌신할 청년들을 일으켜 세웠고 그날에 감동을 받은 청년들은 마치 전체 기립을 명받은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푹 꺼져 있던 사람은 저 혼자였던 것 같았습니다. 헌신하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몇 번의 경험이 있었고 그런 식의 집체적인 감성에 휩쓸린 대응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고집일 뿐입니다. 남들 다 일어나는 집회에서 나도 같이 묻혀서 일어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 걸어가는 길에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성찬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큰 빵 덩어리를 들고 서 있었고 청년들은 각자의 분량을 찢어 볼에 담긴 포도 주스에 적셔 먹는 성찬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야전 성찬이었습니다. 나는 빵 덩어리의 부피가 줄어들 만큼 큼지막하게 찢어 포도 주스를 흠뻑 적셔서 먹었습니다. 한참을 씹어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은 아닙니다. 무엇인가에 갈급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입안에는 여전히 주의 살과 피가 있었고, 그것이 조금씩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찬은 일대일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졸고 있을 수 있으나, 성찬은 자기 손으로 받아 들어야 하고 그것을 입에 넣고 씹어서 넘겨야 합니다. 자기 육부(六腑)로 소화시켜야 합니다. 성찬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루터교회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Christus pro nobis)」 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를 말하는 것이고, 「나를 위한 그리스도 (Christus pro me) 」라고 할 때는 성찬을 말합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것입니다. 그날은 내가 예수님에게 헌신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찢기시고 피 흘리신 것을 성찬을 통해 확인하는 날이었습니다.

 

한 번은 금식기도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침에 금식이 끝나면 흰죽과 무를 넣고 끓인 미소시루와 귤 하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 해외여행을 다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배고플 때 먹는 밥이고 목마를 때 마시는 물입니다. 그래서 항상 밥냄새와 된장국 냄새를 천국 냄새로 여깁니다. 금식이 끝나던 아침, 봉사가 있어서 섭식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을 끝내고 먹으려고 했으나 곧 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먹고 혈색이 돌아와 한껏 커진 목소리로 찬양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배고팠던 저는 한 귀퉁이에 앉아 예배했습니다. 예배에는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진 섭식의 메뉴는 죽과 된장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그것으로 그날 아침 섭식을 했습니다. 한 모금도 되지 않는 음료가 공복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곧 예수님의 피가 모세혈관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가며 각성되는 것 같았던 그날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안에 흐른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던 경험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최초의 성만찬, 즉 예수님이 집전하신 성찬이 있었습니다. 성찬이 있기 전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나갔고, 성만찬 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맹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누구는 예수님을 팔았고 누구는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팔았던 유다에게는 성찬이 없었기에 돌이킬 길을 찾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제자 베드로는 성찬을 알았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리셋(Reset, 초기화)할 수 있었습니다. 상징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복음서 저자에게도 상징적인 기술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치고, 낙심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 일상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직접 제정해주신 것이 성찬이라는 성례입니다. 교만은 겸손으로, 두 개로 나누어진 마음은 하나로, 무책임은 헌신으로 초기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달 첫 주에 어른과 어린이의 구분이 없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와 같은 성찬을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진지한 성찬식을 보며 믿음을 배울 것입니다. 그날을 소중하게 여기고 주의 성찬 앞으로 모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