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마가복음 11:1~10
1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1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11: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 려느냐 하매
11: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11: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11: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여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남의 집에 묶여 있는 어린 새끼 나귀를 끌고 나왔습니다. 주인은 「왜 남의 나귀를 풀어 가느냐」고 물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러주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두말없이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정하시고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선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부르심을 아는 것과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고 멋진 말이 아닌 경험 없는 어린 나귀를 부르셨습니다. 발이 땅에 끌릴 것 같은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 마치 어른이 세발자전거 타는 것처럼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탄 예수님의 눈높이는 사람들의 눈높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고 자기 옷과 종려나무를 길에 깔아 예수님 오시는 길에 레드카펫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말은 십자가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이었고 정치적 회복을 희구하는 이스라엘은 기대에 부풀어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그토록 환호했던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패배했다고 생각한 순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죽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바로 4일 전에 호산나로 열광했던 그 사람들입니다. 열광도 배신도 다 오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 해방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죄의 사슬을 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귀와 공감하기 위해서 조금의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뜬금없이 끌려 나온 나귀는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걷는 것도 자신이 없었고,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불편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집니다. 박수와 찬사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걸어가던 나귀는 어느새 자기가 추앙받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등에 태운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자기가 받으려는 도취나 망상은 나귀 새끼가 아니고 마귀 새끼가 하는 짓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므로 작고 볼품없는 어린 나귀에 탔을 뿐인데 나귀가 착각하여 기세가 등등하여 돌아다니는 꼴이 된 것입니다. 나귀가 가진 연약함에 공감하므로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국 책임은 나귀가 져야 할 것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준비된 레드카펫을 신의 것이라고 하여 밟지 않았습니다. 아가멤논은 신적 권위를 빌려오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종교보다 그리스신화가 더 인간적인 것 같습니다.

 

목사가 외부에 나가면 환영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를 섬기는 것은 예수님을 태우고 온 나귀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접받다 보면 자기가 대접받아 마땅한 사람인 줄로 착각하게 됩니다. 나귀 이야기는 제가 만든 픽션이니 나귀에게 미안하지만, 목사에게 그런 유혹과 위험은 실재합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타고 다녀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나귀의 정체성은 위대한 것이 아니고, 유명한 것도 아니고, 실력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의 정체성은 작은 것이고, 볼품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이나 함부로 등에 태우고 다니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주가 쓰시겠다하라… 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