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마태 23장 13~24
마23: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23:14 (없 음)
마23: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23: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23: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 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마23: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23: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마23: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마23: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마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23: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실 때 비유로 가르치시고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조건 없이 치유와 사랑을 베푸셨지만, 위선자들에게 대단히 엄격한 말로 비난하고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엄격한 일곱 화들 중에 네 개의 화가 나옵니다. 화는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저주를 뜻하고 이 저주를 초래하는 공통적인 죄는 외식입니다. 외식이란 베우가 가면을 쓴다는 의미이고 여기서는 위선을 뜻합니다.

 

13절의 첫 번째 저주는 가르치는 자리에서 위선을 행하므로 자신도 망하고 따르는 사람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학습입니다. 모르면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틀린 것을 가르치면 가르치는 자도 틀린 것을 학습하게 됩니다. 위선된 것을 가르치거나 모순된 것을 가르치면 자신이 가르친 것에 자신이 학습되어 모순과 위선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지적이고 인격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함께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것에 오염됩니다.

 

15절의 두 번째 저주는 신자를 교육하는 목적이 성경적 진리의 지도가 아니라 교권을 위한 동원이라는 비판입니다. 이것도 항상 가면을 쓰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 신앙의 절차상의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요구하는 것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해야 하는 중요한 직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책망히신 것은 헌신을 빙자하여 파당적 종교를 추종하게 만들고 신자를 노동력과 재정의 동원의 도구를 삼는 것입니다. 근간에 교회를 정치적으로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허용해서도 안 되고 용서해서도 안 됩니다.

 

16절의 세 번째 저주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노골적인 본심이 드러납니다.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전의 금이란 예물을 말합니다. 신자를 현금화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입니다. 욕심은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금 보다 낮추어 버렸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믿고 있는 내용이 그대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23절의 네 번째 저주는 세분화된 규정과 전통에는 민감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신자가 십일조을 내는 것에 대한 교육은 철저히 행했지만, 의와 인과 신의 교육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의(義)로 번역된 크리시스(κρισις)는 공의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의한 종말론적 심판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仁), 엘레오스((ἔλεος)는 자비를 뜻하고, 신(信) 피스티스(πίστις)는 신의, 신뢰, 믿음입니다. 위선 안에 공의와 자비와 신의가 함께 있지 못합니다. 위선이라는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매일 아침 자신의 신념과 입장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와서 자신을 환기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게 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fEbW-Ktq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