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마태5장 1~16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에 들어왔습니다. 5장에서 산상수훈이 소개되기 시작해서 7장까지 이어집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여덟 개의 「복이 있나니」라는 말로 어어져 있습니다. 「복이 있을 것이니」가 아니고 「복이 있나니」 입니다. 추가되어야 할 행복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가난한 것과 슬픈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읽어보면 인생이 추구하는 물질적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생이 겪어야 하는 고생과 그 고생을 통한 내면의 성숙이 그들이 받는 축복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입니다.

 

팔복을 한 페이지로 정리해서 말해야 하는 것은 난감한 일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복에서 말하는 슬픔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은 아프게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인데 아픈 것과 슬픈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전해 주신 복된 소식 즉 십자가의 사랑이 나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이 되려면 십자가보다 부활보다 천국보다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죄」의 자각이고 인정입니다. 그러고 나면 아프고 슬퍼집니다. 그것으로 인한 애통입니다.

 

그러니 복이 있어서 위로를 받는 사람은 믿음이 충만하여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니고 결핍되고 불완전해서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인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어떤 이유로 자신감과 당당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구원에 마땅한 감정과 태도는 감사와 겸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윤동주의 『팔복』이라는 시에는 「마태복음 5장 4절」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그 4절은 우리가 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이 시는 애통을 슬픔으로 바꾸어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고 마지막 연을 띄우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말하고 끝나버립니다.

 

팔복의 성경적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면 윤동주의 팔복을 염세적으로 읽을 것입니다. 윤동주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감정을 대변하여 여덟 가지 복 중에 슬픔을 대표로 삼았습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면 영원히 슬퍼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복이 있다는 역설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뒤집어서 말하면 영원히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원히 슬퍼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원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차원이고 영원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지금일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지만 죄로 인한 슬픔이 완전하게 사라질 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지금처럼…… 그러나 그 슬픔 위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애통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하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