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3:1-12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역사상 기독교 신앙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인권 신장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가 한국 사회에 들어왔을 때 교회는 처음으로 여성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누구누구 엄마로만 불리던 여성에게 이름을 붙여 집사님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처음 경험하는 사회적인 인정이고 개인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성경이 남성우월주의라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천년에서 오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의 컨텍스트를 이해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여성의 지위는 가히 혁명적인 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유일한 삶의 규범으로 삼는 사람들을 통해 지금도 공펑과 정의에 입각한 한 인간의 권리는 더욱 신장되어져 갈 것입니다.
일부 남성 우월주의나 일부 피해 의식으로 치우친 페미니즘은 이 본문을 둘러싸고 싸우려고 하지만 오늘 본문은 남녀가 우열을 가리는 대결의 본문이 아닙니다. 요약하면 여성과 남성이 서로 존중하면서 섬기라는 말입니다. 지배하거나 가르치는 방법이 아닌 섬기는 방법을 통해서 가정과 교회에 덕을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하다면 생명의 열매 즉 선교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력 행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변하는 세상에 어떤 코드로 변환하여 흘려보낼 것인가입니다. 믿음의 진정성은 가정과 직장과 공동체의 관계성 안에서 건덕의 열매로 맺힐 것입니다.
아침 QT 말씀은 다니엘에 이어 베드로전서를 읽고 있고 수요예배는 베드로후서 1장의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성도의 성장에 대해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기도회의 말씀은 잠언의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22:11」 였습니다.
최근 들어 반복하고 겹져서 주시는 말씀의 공통적 주제는 건덕인 것 같습니다. 덕을 세우는 일, 옳고 그름의 논리를 따지기보다 품어내는 덕입니다. 우리는 건물 구입을 추진하고 있고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지역과 시대에 하나님의 덕을 세우는 일인가 봅니다.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는 성도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