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벧전 4:1-11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고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17」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생(거듭남;Born Again )입니다.

 

중생이란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성도는 한 번 죽고 다시 살아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셔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애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고 죄를 원인으로 하는 사망은 육신과 영혼의 영원한 사망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육체가 두 번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부활하는 영적 부활이 중생 즉 거듭남입니다.

 

영적 사망은 죽은 자가 스스로를 살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의지는 사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무능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자비의 의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되 자신의 힘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도는 택하심과 부르심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중생합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성령을 어떻에 인식하고 무엇으로 거듭남을 자각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중생 전과 후를 비교했습니다. 그것이 거듭남을 가르는 표시입니다. 베드로의 표현에 따르면 이전의 육체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와 사람의 정욕을 좇는 극한 방탕의 달음질」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에게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그 근신과 기도라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받은 은사를 따라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삶으로 성령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남의 죄를 용서하면 나의 죄도 용서함을 받습니다. 사랑이 죄를 덮는다는 것이 곧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 의해서 서로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