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벧전 5:1-7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공동체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형성하게 되고 역할을 분담하게 됩니다. 출애굽한 후 법률적이고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한 공동체는 모든 것을 모세에게 의지하였고 곧 광야의 이스라엘 사회는 갈등과 분쟁에 휩싸였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제안에 의해 이스라엘 사회는 중간 리더를 세워 리더십을 분할하고 조직적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도 사람들이 증가했는데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배식을 했고 역할이 분담되어 있지 않던 교회에서 사도들이 배식하는 일로 말씀과 기도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교회는 처음으로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렇다고 배식을 위해서 집사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계기로 공동체의 역할 분담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집사는 성령의 충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세웠습니다. 그중 한 명이던 스데반의 설교(사도행전7장)를 읽어보면 지적으로 영적으로 탁월한 교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와 성경 교사는 동일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배를 집전하는 목사가 성경 교사를 겸하겠지만 목사가 아니어도 성경 교사의 직무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상하 구조가 아니고 입체적 구조입니다. 모든 성도는 말씀에 대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동시에 입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는 교회입니다.

 

본문 당시에 장로라 함은 현재 장로교 교회에서 교회 정치에 참여하는 장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목사를 지칭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목사나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성직과 평신도를 불문하고 인도해야 할 입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말은 그 말 자체에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목사의 직분과 성도의 직분이 다를 뿐 성(聖)과 평(平)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이면 성도이고 신도이면 신도이지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모순이며 성직주의라는 계급적 문화의 소산입니다.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속 교단에서 목사 시험을 치고 안수를 받은 사람이겠지만 어디까지나 목사를 세우는 주체는 교회입니다. 목사는 교회 공동체가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세워진 목사의 리더십에 대한 보장은 교회공동체에 의해서 지켜집니다.

 

그러하듯이 교회가 성경 교사로 세운 사람에게는 교회에 의해 그 권한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것에 부름받은 사명에 대한 인식이 입니다. 베드로는 그 직무로 부르심을 확인시키고 공동체에게 그 권위의 인정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서로 겸손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상위와 하위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