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 22~36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2:31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는 시편 16편과 110편을 끄집어내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복음의 핵심을 설교합니다. 구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 다윗은 유대인들에게 영웅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이 고백했던 주가 그들이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대속의 제물이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기보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한 대속제물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제물로 죽었습니다. 대속제물은 유대인이 잘 아는 개념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으니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에 더 큰 강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 사상 위에서 유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코드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와 지역에는 그들만의 사상과 종교와 문화적인 코드가 있습니다. 단자가 맞아야 접속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전반부에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단자와 베드로 퇴장 이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접속단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 알아듣는 이야기로 전했고 바울은 로마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알아듣는 이야기로 전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열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문화와 역사를 알고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면 복음은 구원의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선교 신학에서 「상황화(常況化, Contextualization)」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복음 증거를 위한 표현양식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씨만 가지고 있다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가 구약으로 복음을 증거하면서 유대인을 상황화하는 것이 성령의 지혜입니다. 여기에서도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가 이 변하는 도시 안에서 변하지 않는 복음을 이어줄 수 있는 복음의 커넥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